세 번째로 방문한 도쿄. 이번에는 처음으로 시부야를 벗어났다.
매번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시부야에 머물렀다. 다른 곳을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부야를 다 돌아보기에도 부족한 시간, 굳이 기차를 타고 시내를 벗어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구글맵을 켜고, 이번 여정에서는 어떤 곳을 가볼지 고민하던 중 시부야 시내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에비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는 에비스에 위치한 캐피탈(KAPITAL) 매장 세 개가 눈에 띄었다.
옹기종기 사이좋게 모여있는 세 개의 캐피탈 매장. 어째서 이들은 하나의 큰 매장이 아닌, 세 개의 다른 매장을 운영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가 궁금했다.
2박 3일의 짧은 여정, 그마저 첫째 날과 둘째 날은 업무로 바빴다. 나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은 마지막날이 전부였다. 다행인 건 비행기 시간이 늦은 오후여서 하루라도 여유가 있었다.
날이 밝았다. 짐을 챙겼다. 호텔을 나섰고, 주저 없이 역으로 향했다. 복잡한 일본 지하철, 이제는 익숙했다. 출장으로 방문하여 자주 이용해 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부터 챙겨 온 스이카 카드의 잔고를 확인했다. 에비스에 갔다가 공항으로 가기에도 충분한 금액이 남아있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주저 없이 카드를 찍고 에비스로 향했다.
일본은 여전히 기관사가 사람이 다 내렸는지 직접 내려서 확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에비스역에 내려서 기다렸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기관사가 문을 열고 내리더니 아직 못 탄 사람이 없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기차가 출발했다.
10월 24일. 한국은 밤이면 찬 공기가 불었다. 바로 옆 나라 일본은 달랐다. 여전히 강한 햇빛 때문에 더위가 느껴졌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가방에 넣었다. 작은 여행 가방 하나만 가지고 떠난 여행, 재킷이 들어가니 더 이상 자리가 없었다.
목적지는 대로에 위치한 첫 번째 캐피탈 매장. 구글맵에 목적지를 검색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도착하니 오픈까지 시간이 남았다. 오픈시간은 오전 11시. 세 개의 매장이 동시에 영업을 시작했다. 굳게 닫힌 매장 문을 잠시 바라보다 바로 옆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해 보니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다.
일본 편의점에는 공중화장실이 있다. 누구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간단하게 끼니도 해결하고, 화장실도 이용했다. 잠시 휴식을 가지니 어느덧 오픈 시간이 다가왔다. 다시 매장으로 향했다.
매장 문은 정확히 11시에 맞춰서 열렸다. 내가 그날의 첫 번째 손님이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매장 안으로 들어가니 직원들이 웃음을 지었다. 덩달아 웃었다. 사진 촬영이 가능하냐는 간단한 질문을 언어 장벽에 막혀 손짓발짓으로 어렵게 물었다. 원래는 불가한데, 그냥 찍으라는 투였다. 그렇게 했다.
매장은 외부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컸다. 2층까지 있었고, 제품들도 가득 차 있었다. 특유의 히피스러운 작품들도 중간중간 배치되어 있었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단순히 제품을 진열해 놓은 게 아닌, 브랜드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마음에 들었던 벨트가 보였다. 재고를 물었다. 마지막 하나라더라. 고민 없이 달라고 말했다. 1만 3천엔, 한국에서는 30만 원이 넘는 제품이었다. 횡재다.
계산을 위해 1층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손님이 많이 늘었다. 익숙한 한국말이 귀에 들어왔다. 역시 한국인들은 캐피탈을 좋아해.
계산을 끝내고 첫 번째 매장을 나왔다. 다음으로 가볼 곳은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한 캐피탈 렉스(KAPITAL LEGS)다. 브랜드의 대표적인 데님류 제품들이 모여있는 공간이다. 기대됐다. 센츄리 재킷과 팬츠를 가지고 있는데,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부츠컷 센츄리 팬츠가 탐났는데, 있기를 바라며 빠르게 매장으로 향했다.
첫 번째 매장보다 밝은 분위기의 직원들이 반겼다. 그들과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부츠컷 센츄리 팬츠의 재고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재고가 없다는 것. 허탈한 마음에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그러던 중 떡하니 걸려있는 부츠컷 센츄리 팬츠가 눈에 들어왔다. 직원에게 이건 뭐냐고 물었다. 그는 나에게 안 맞는 사이즈라며 손을 가로저었다. 혹시 다른 사이즈 재고는 없는지 물었다. 36 사이즈가 있는데, 크게 나와서 나에게는 맞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 없지. 입어보겠다고 했다.
직원의 말대로 나에게는 너무 컸다. 허리는 흘러내렸고, 허벅지는 한참 남았다. 집에 있는 캐피탈 5 포켓 1.2.3 데님 팬츠를 생각했다. 처음 세탁을 하고 건조기를 돌렸을 때, 수축이 많이 있었다. 기장은 3cm가량 줄었고, 허벅지와 밑단도 1cm 이상 줄어서 다리에 딱 맞게 변했다. 모 아니면 도. 도박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묘한 웃음을 띠며 구매를 막는 직원에게 당당히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도 겨우 포기하는 눈치였다. 다른 직원이 옆으로 다가와 기장 수선을 할 건지 물었다. 여기서 기장 수선이 된다고? 수축까지 계산해서 기장 수선을 직접 해주겠다길래 말리지 않았다.
1시간가량 수다를 떨었다. 직원들이 입고 있는 옷은 캐피탈이 제공하는 유니폼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11월에 리(Lee) 라이더 기반의 센츄리 재킷이 재발매 예정이라는 희소식도 들었다. 워낙에 소량생산하고, 매장마다 다른 재고를 넣기 때문에 원하는 제품을 얻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됐다. 즐거웠다.
캐피탈 렉스 직원 둘과는 친구가 됐다. 인스타그램 맞팔을 했고, 다음에 한국에 오게 되면 꼭 연락을 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아쉬움을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다른 매장도 3분 거리에 있었다. 더플 위드 캐피탈(Duffle with Kapital)이라는 이름의 매장. 이곳이 가장 특별한 경험을 제공했다.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어야 했다. 안쪽 바닥은 다다미가 깔려있었고, 1층 규모는 작았지만, 지하로 내려가니 거대한 매장이 나타났다. 압도됐다. 구경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천천히 하나하나 옷을 만져보며 예술적인 브랜드의 메이킹 과정을 손에 담았다.
재고는 처음 방문했던 대로변의 캐피탈과 비슷했다. 제품군은 일부 차이가 있었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경험적인 측면에서 새로움을 제공했다. 매장 입구부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소파가 있고, 캐피탈 무드가 느껴지는 아트피스들이 가득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간 매장의 다다미도 즐거움을 선사했다. 하지만 지갑을 열지는 않았다. 이미 충분한 소비를 했기 때문이었을까. 애써 제품들에서 손을 떼고 시선을 돌렸다.
충분히 가치 있다. 시간을 내서 에비스에 방문할 이유가 있다. 캐피탈 매장 세 개만 돌아보더라도 이유는 충분하다. 한 정거장 떨어진 곳인데도 시부야보다 한적한 동네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골목은 여유롭고 깨끗했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벤치에 앉아 여유를 즐겼을 텐데. 다음을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