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로고, 외계인의 표식일까. 울타리, 티셔츠, 비행기 등 잊을만하면 눈앞에 나타난다.
익숙해진 탓인지, 이 로고가 박혀있는 머천다이즈가 멋있어 보여서 볼 때마다 구매 욕구가 치솟는다. 그러나 어느 브랜드 로고인지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패션 브랜드가 아니었으니까.
로고의 주인은 바로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 정확히 말하자면 에이펙스 트윈의 앨범 [Selected Ambient Works 85-92]에 앨범 커버로 사용된 것이다. 원래는 폴 니콜슨이 ‘Anarchic Adjustment’라는 브랜드 로고로 쓸 계획이었다고.
전자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에이펙스 트윈이지만, 캐릭터 하나만으로도 할 말이 많은 아티스트다. 앨범 커버 하나로 컬트적인 인기를 구사하는 에이펙스 트윈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
내 이름엔 죽은 형이 들어가 있다
‘리처드 데이비드 제임스. 에이펙스 트윈의 본명이다. 그의 형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어머니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고, 이후 아들이 태어나면 해당 이름을 그에게 주기로 했다. 그렇게 죽은 형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에이펙스 트윈’이라는 예명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어졌다. 하나의 이름에 두 명의 자아가 들어있다는 뜻으로 ‘쌍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그의 형과 관련된 이야기는 에이펙스 트윈의 활동 중에도 종종 나타난다. 1996년에 발매된 에이펙스 트윈의 EP [Girl/Boy] 앨범 커버는 실제 형의 묘지였던 것.
두 개의 자아가 한 이름에 들어있는 것처럼 그는 시끄러운 음악과 조용한 음악을 잘 섞어, 하나로 만들어 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시끄러운데 조용해, 조용한데 시끄러워
에이펙스 트윈은 미니멀한 구성으로 사운드에 공간감을 주는 ‘앰비언트 뮤직’의 혁명가로 불린다. 앰비언트 뮤직을 들어보면 안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얼마나 재미없고 조용한 음악인지.
즐거움이 다소 부족한 장르기에 대중들에게 외면받기는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앰비언트 뮤직의 서정적인 멜로디에 공격적인 사운드를 섞었다. 시끄러운데 조용하고, 조용한데 시끄러운 음악의 이상한 매력에 모두 빠질 수밖에. 그는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냈다.
그런 자기만의 창조 방식을 통해 에이펙스 트윈은 추상적이고 복잡한 ‘IDM(Intelligent Dance Music)’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선구자로 인정받는다. ‘슈퍼콜라이더’라는 오디오 합성 및 작곡 소프트웨어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고.
개인 탱크도 소유한 괴짜
에이펙스 트윈은 괴짜로도 유명하다. 평범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자주 하는 편. 자가 탱크를 보유하고 있으며, 탱크의 이름은 ‘제임스’다. 그의 말에 따르면 탱크 소리가 장난 아니게 멋지다고.
‘AFX’, ‘Caustic Window’ 등 에이펙스 트윈이 아닌 다른 예명만 알려진 게 열세 개나 존재한다. 다양한 장르를 구사하는 만큼 장르별로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지, 일부러 팬들을 골리고 싶어 그런 건 아니라고. 무료 스트리밍 플랫폼 ‘사운드클라우드’의 기본 이름인 ‘user18081971’을 포함하면 열네 개가 된다.
제 앨범 커버, 불편해요?
에이펙스 트윈 앨범 커버하면 상징적인 로고가 떠오르지만, 이면에는 엄청나게 기괴한 앨범 커버들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앨범, [Richard D James Album]의 커버 사진은 섬뜩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대문짝만하게 사용했다.
이 앨범은 기괴함이 꽤나 약한 축에 속한다.
1997년 [Come to Daddy]에서는 모든 아역 배우들의 얼굴에 그의 얼굴이 합성되어 있다.
그의 합성은 끝나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팬이 장난스럽게 합성한 것 같은 이 사진이 공식 앨범 사진이라니. 앨범 수록곡 ‘ΔM¡⁻¹ = −αΣn=1ND¡[n] Σj∈C[i]Fj¡[n|− 1] + Fext¡[n⁻¹]’ 는 기호만 봐도 속이 울렁거리는 수포자들에게 최악의 곡 제목일 것이다. ‘방정식’으로 불리는 이 음악에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들만 잔뜩 나온다. 들으라고 만든 음악이 아니었다. 스펙트로그램을 이용해 음악을 들으면, 그의 얼굴이 깜짝 등장한다. 꽤나 에이펙스 트윈이 할 법한 범상치 않은 행동이었다.
그는 그저 포토샵으로 장난치는 게 재미있어서 이런 사진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본인도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린다고.
에이펙스 트윈이 가지고 논 사진들, 심장이 약하다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지도.
이 정도면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든다면 당신은 에이펙스 트윈에게 스며든 것.
요크가 좋아하는 아티스트
에이펙스 트윈은 이름에 ‘요크’가 들어가는 두 아티스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다. 바로 ‘비요크’와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
라디오헤드의 명반으로 불리는 [Kid A]는 에이펙스 트윈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은 앨범이다. 톰 요크는 에이펙스 트윈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고, 완벽하다며 숭배하는 모습도 보여줄 정도로 에이펙스 트윈의 팬이었다.
그러나 에이펙스 트윈은 라디오헤드를 썩 좋아하지 않는 편. 대중적인 음악을 별로 안 좋아하는 그였기 때문이다. 언론이 이를 과장하여, 에이펙스 트윈은 톰 요크에게 뉴스를 너무 믿지 말라고 따로 얘기를 했다고도 한다.
비요크는 1997년, 에이펙스 트윈의 [Come to Daddy] 발매 당시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이자 가장 흥미로운 비디오로 소개했다.
“에이펙스 트윈은 왕이에요”
-비요크(Björk)
명상할 때 들을 법한 앰비언트 뮤직을 대중음악으로 끌어올린 천재 에이펙스 트윈. 그의 천재적인 감각과 괴짜스러운 행동은 모두가 그를 주목하기에 충분했다.
매체를 통해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는 모습마저 ‘에이펙스 트윈’이라는 이름에 너무나도 어울렸다.
리처드 데이비드 제임스라는 ‘사람’의 매력을 충분히 느꼈을 터. 이제는 어렵다고 느낄 수 있는 에이펙스 트윈의 음악을 감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