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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추상주의 화가가 아니다

마크 로스코의 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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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로스코

‘오렌지, 레드, 옐로’, ‘No. 1’, ‘No. 6’, ‘No. 10’. 모두 그의 작품 이름이다.
붉은 바탕에 붉은 직사각형, ‘레드’로 알려진 작품은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들 중 하나다.

그는 1970년, 66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단지 직사각형으로만 보였던 ‘레드’는 그의 우울한 내면을 보여주었던 걸까 생각이 든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마크로스코

삶의 시작

1903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유대인 가정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난 로스코. 유럽 전역에서 반유대주의가 만연했던 시대로, 그의 가족은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횡단해 미국 서부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에 정착했다.

하지만 이주 후 몇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암으로 사망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던 상황에 가족은 모두 생업에 뛰어들고, 어린 로스코도 신문 판매원 일을 시작했다.

마크로스코

한편 학업에도 우수했던 그는 17살의 나이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장학금을 받으며 예일대에 입학하지만, 1학년을 마칠 때 장학금이 끊기게 되었다. 

풍족한 가정이 아니었기에 웨이터와 배달 일을 하며 학비를 충당해 보려 노력했지만, 결국 교내의 엘리트주의, 인종차별주의적인 문화에 반감을 느끼고 자퇴했다.

마크로스코

예술이 되다

1923년 뉴욕으로 이주하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하게 된다. 인체 드로잉을 연습하는 친구를 보고, 예술가로서의 삶을 결심한 것이다.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막스 웨버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마티스의 표현주의를 추구하는 밀턴 에브리를 만나며 본인만의 세계관과 예술관을 개척해 나갔다.

마크로스코

그의 초기 작품은 널리 알려진 로스코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일 것이다. 신화에서 영감을 받아 유럽의 초현실주의 양식을 활용하여 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다.

학생들을 지도하고 전시회에 출품도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그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기도 했다.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고 ‘예술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며 약 1년간의 시간을 보낸 후 자신의 예술론을 정립했다.

마크로스코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여행에서 추상화가 클리포드 스틸을 만나며, 그를 상징하는 ‘멀티폼’이라 불리는 색면 회화를 완성하게 된다. 1945년 뉴욕 맨해튼에서 개인전을 열며, 40대 초반의 나이에 비로소 예술계와 대중들에게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이 시기에 미국의 예술계는 유럽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로스코의 전시회는 연이어 호평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MoMA(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미국 예술가 15인>전에 참여를 하고 이후 회고전도 열리며 ‘성공한’ 예술가로 인정을 받게 된다.

마크로스코

죽음의 선택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의 방식으로 예술을 표현하고 대중들에게 이해를 받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예술가로서의 삶이었지만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그는 항상 예술에 대해 깊이 탐구했고,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고민을 했다. 예술 작품이 부유층의 장식품이 되는 것에 대해 큰 반발심을 느꼈다. 예술가로서 작품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에서의 예술의 위치와 방향성, 본질적인 의미에 관해서도 끊임없이 생각을 했다.

마크로스코

로스코의 내면은 항상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철학에 관심이 많고 생각이 깊었던 그는 부정적인 기사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을 했으며, 예술적 한계에 대한 고뇌가 지속되었다. 명성과 부를 얻으며 그에게 영감을 준 친구 스틸과의 관계도 틀어졌다. 

또한 다음 세대의 예술로 팝아트가 각광을 받기 시작하며 예술계에서의 자신의 위치 또한 불확실해진 것이다. 

결국 그는 지속된 우울증에 건강 악화까지 더해, 알코올과 약물 남용에 빠지며 1970년 2월, 자신의 작업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크로스코

로스코는 추상주의로 설명되는 것을 거부하며, 그저 비극, 황홀경, 운명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명에는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는 대중들과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음에 그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내면의 소리에 집중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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