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눈썹, 콧수염의 흔적과 심상치 않은 눈빛을 가진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칼로(Frida kahlo).
어릴 적 그녀를 처음 마주했을 때, 강렬한 인상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가 사고로 인해 하반신 마비로 인생의 절반 인생을 누워 지내면서도, 예술을 계속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프리다 칼로는 18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평생 고통을 겪었다. 그녀는 자신은 다친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이라고 표현했다.
평화라는 이름을 가지고
독일 말로 ‘프리다(Frida)’. 평화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녀.
그녀는 1906년 태어나 사진작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꾸준히 음악, 미술, 철학과 가까이 지냈다.
아버지를 따라 카메라를 다루는 법을 배웠고, 이는 훗날 그녀가 그린 초상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 그녀는 여섯 살의 나이에 소아마비를 앓아 아홉달 간 집에만 있게 된다. 회복 이후에도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인생에서 그리 크지 않은 시련이었다.
그녀는 일어날 수 있게 되자 많은 운동을 섭렵했다. 수영, 복싱과 자전거가 그 예.
그만큼 고집이 있었고 가만히 순응만 하지 않던 그녀는 멕시코 시티 중앙에 위치한 국립 예비 학교에 진학한다.
당시 학교는 혼돈에 가득 차 있었다. 멕시코 혁명 이후 분노와 열정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
당시 여성의 대학 입학은 큰 충격이었으며 프리다는 낭만적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혁명군들을 응원하던 어머니의 영향이 있었다.
학교 내 개혁을 하고자 했고, 파격적인 행보를 걸어간다. 개를 풀어놓거나 복도를 당나귀를 타고 지나가는 무질서한 행동을 벌인 것.
머리가 좋아서 교과서를 한 번 읽고 다 암기해버리기도 한 그녀는 자신의 행동으로 퇴학 통보를 받자 책상을 박차고 학교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고를 당하다
그리고 평생을 바꿔버린 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녀는 당시 학교에서 사귀었던 남자친구와 본가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그때 버스와 전차가 충돌해 버렸다. 이 사고로 왼쪽 다리 11곳, 허리, 골반, 쇄골 등의 부위가 골절되고 갈비뼈가 부러진다.
칼로는 당시 사고로 죽을 때까지 하반신마비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고, 끊임없는 수술로 인해 고통스러운 평생을 보내야 했다. 총 35번의 수술을 받기까지 했다고.
그녀는 사고 후 3개월 동안 전신 깁스를 하고 침대에 누워 그림을 그렸다. 의사를 꿈꿨을 만큼 머리가 좋았던 그녀는 과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을 결합해 의료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침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특별히 만든 지지대, 이젤을 만들어주었고 아버지는 유화 물감을 빌려줬다.
그리고 병상에 누워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거울을 달아줬다.
그렇게 그려낸 그림은 프리다 칼로가 살아가는 데 있어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탐구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두번째 사고
고난스러운 재활훈련을 거치고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된 프리다 칼로.
멕시코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게 되는데, 그 안에서 평생의 연인, 디에고 리베라와 만난다.
그 당시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보고 틀림없는 예술가라고 불렀다고.
멕시코에서 가장 존경받는 벽화 화가였던 디에고 리베라. 그와 프리다 칼로는 결혼한다. 결혼 당시 그녀는 스물 하나, 리베라는 마흔셋이었다.
“나는 일생에 큰 사고를 두 번 당했다. 하나는 전차 사고였고, 다른 하나는 디에고를 만난 것이다.”
이들은 멕시코 문화의 상징이 되었지만 칼로에게 리베라는 기쁨이자 고통, 희망이자 절망이었다.
리베라와 이혼과 재결합을 모두 겪었으며 교통사고 당시 자궁을 다쳤던 후유증으로 가진 아이를 모두 비극적으로 유산하기도 했다.
그녀의 유산 당시 리베라는 칼로의 동생과 불륜을 저질렀다.
그때의 분노와 절망감으로 칼로는 맞바람을 피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의 이별의 시간을 거치고 리베라가 손을 내밀었을 때 또 받아준다.
이때 작품활동에 온 열정을 다해 파블로 피카소에게 천재적인 초현실주의 화가라는 찬사를 받는다.
꽃들이 죽지 않도록 나는 꽃을 그린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 대해 끝없이 연구하며 일생을 예술을 창작하는 데에 바쳤다.
짧은 생애 동안 그린 작품이 200여 점 이상으로 대부분 자화상이다.
“나는 나를 그린다. 나는 혼자이며 내가 제일 잘 아는 주제는 바로 나 자신이다.”
그녀는 자신의 망가진 몸의 수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독자적인 화풍으로 현대와 전통의 경계를 넘어섰다. 그녀의 비현실과 현실을 넘나드는 그림은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칭해진다.
남편 디에고의 대한 애증의 감정도 수없이 많이 담았다.
과일을 갈기갈기 찢어놓기도 하며, 리베라와 자신의 유약한 신체를 비현실적으로 그려냈다.
패션으로 승화했다
그녀는 패션으로서도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승화시켰다.
그림으로서는 자신의 비극을 있는 그대로 표출했다면, 의상으로는 경쾌한 스타일을 추구했다.
특히, 교통사고 이후 극심한 통증을 가져다준 다리를 위해 의족을 사용했는데 용 문양이 그려진 새빨간 컬러의 신발이 돋보인다.
멕시코 전통을 반영하고 남성성을 넘나드는 개성 강한 의상들 또한 그녀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
그녀의 의상들은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스키아파렐리, 칼 라거펠트, 장 폴 고티에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마지막 외출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에서 인지도를 얻고 급격히 건강이 악화됐다.
척추를 지지하기 위한 수술 시도는 실패했고, 이 시기에 자신의 신체 상태를 반영한 작품들을 그렸다.
폐렴이 재발해 몇 년 동안 ‘카사 아줄(Casa Azul)’이라는 곳에 갇혀 살게 된 그녀.
마지막 유화에 ‘Viva La Vida (인생 만세)’라고 적었다. 그리고 한 마디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 외출이 행복한 외출이 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