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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상은 점으로 사라졌다

어느 날, 꽃이 쿠사마 야요이에게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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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하나를 그려보자. 완벽하지 않아도, 삐뚤어져도 괜찮다. 그런 것쯤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 그 점 하나만으로 당신의 세계는 확장될 테니. 쿠사마 야요이는 무수히 많은 점들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자신을 뒤덮었던 점의 세계를 깨버리고 말이다.

“물방울무늬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소멸시키고, 우주의 본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본 환각과 붕괴된 자아를 작품에 담아냈다. 이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넘어, 내면의 고통과 정신에 직면해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해방의 수단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평생의 토대가 된다. 쿠사마 야요이 역시 어렸을 때의 기억이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어느 날, 꽃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스스로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쿠사마 야요이. 어떤 날은 집에 늘 있던 붉은 꽃무늬 식탁보가 잔상으로 남아 그녀를 온통 뒤덮었다. 그리고 쿠사마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녀의 그림을 찢고 빼앗으며 좌절시켰다. 딸이 정신적 질환을 겪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쿠사마는 들키지 않기 위해 서둘러 그림을 완성해냈지, 결코 멈추지는 않았다.

1948년, 쿠사마 야요이는 가족들의 품을 떠나 교토 시립 예술 공예 학교에 진학한다. 그러나 틀에 박히고 전통적인 교육 방식, 그리고 니혼가(일본화)를 거부한 그녀. 결국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고, 실질적으로 미술을 공부한 기간은 겨우 1년 남짓이었다.

23살이 된 그녀는 시민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전시 중 만난 나가노 대학 정신의학과 교수에게서 자신이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강박 장애와 편집증. 이것이 그녀의 병명이었다. 쿠사마는 무언가를 잊으려 할 때마다 일정한 행동을 반복적으로 했다. 동일한 요소를 끊임없이 채워나갔던 쿠사마 야요이. 이는 그녀의 아이덴티티로 자리 잡게 된다.

쿠사마 야요이는 일본이 싫었다. 그녀는 뉴욕에서 성공한 여성 예술가, 조지아 오키프에게 무작정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조지아 오키프는 미국으로 와 작품에 관심이 있을 만한 사람에게 작품을 보여주라고 조언했다. 이에 쿠사마는 달러를 기모노에 꿰매고 태평양을 건넌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 일본에서 그렸던 초기 작품 중 일부를 파괴하고 갔다.

“나는 단 하나의 물방울무늬로 모두에게 맞서겠다.”

물론 타지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겨우 전시를 열었지만 가난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직접 참여 의사를 밝혔지만 결국 초청받지 못한 쿠사마 야요이. 이에 그녀는 퍼포먼스로 대응했다. 쿠사마는 초대받지도 않은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리고 베니스 비엔날레의 파빌리온 잔디밭에 물방울 모양의 오브제 1,500여 개와 표지판 두 개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나르시스 정원, 쿠사마’, ‘당신의 나르시시즘을 판매합니다.’

각 오브제에는 쿠사마 야요이의 사인이 있었고 그녀는 이를 개당 2달러에 판매했다. 당시 비엔날레 측은 이를 제지했고, 이듬해 그녀는 베니스 비엔날레로부터 초대장을 받았다.

어릴 때 아버지의 외도를 지켜본 쿠사마 야요이. 그녀 일생에 유일한 남자친구는 조셉 코넬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1977년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녀는 수십 년간 이곳에서 도보 거리에 있는 스튜디오에 드나들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나는 매일 고통과 불안,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 나를 완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창작이다.”

2009년, 80세가 된 쿠사마는 <My Eternal> 시리즈를 시작하며 1년 반 동안 100개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는 2021년까지 연장되어 900개의 연작을 만들어냈다.

“단 하나의 점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점 하나로는 어떠한 것도 달성할 수 없다는 쿠사마 야요이. 그녀는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점을 그려나간다. 쿠사마 야요이의 세상은 점으로 사라졌지만, 그녀는 점으로 자신의 세계를 개척해나갔다.

“내 인생은 수천 개의 점들 사이에서 잃어버린 점이다. 나는 이 세상의 또 다른 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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