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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키아의 옷장을 열었다

아르마니, 이세이 미야케, 꼼 데 가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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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인 당신. 오늘은 무엇을 입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곡을 써 내려갔는가.

장 미쉘 바스키아의 옷장에는 그의 색이 진하게 묻어난다. 다림질하지 않은 셔츠와 삐딱하게 맨 넥타이, 어깨에 걸친 자켓과 낡은 스니커즈. 그의 캔버스와 옷장에는 결코 틀이 존재하지 않았다.

첫 번째, 아르마니

바스키아가 그림을 그릴 때면 아르마니 수트가 함께 했다. 거친 자유로움을 캔버스에 써 내려간 그의 그림과 상반되는 세련된 정장. 하지만 그 상반됨이 바스키아와 궤를 함께 할지도 모르겠다.

바스키아에게 아르마니 수트는 작업복이었고, 페인트로 물든 아르마니 수트는 그의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더 이상 낙서가 아닌 예술로써 자리 잡은 아르마니, 그리고 이를 팝 아트와 결합한 바스키아의 작품 세계. 바스키아가 두 세계를 하나로 탄생시킨 것처럼, 그의 패션 세계 또한 그랬다. 정장과 스니커즈, 스웨트 셔츠와 주름진 셔츠, 상이한 두 세계는 그의 몸에서 하나가 되었다.

‘패션이란 청결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업’임을 외친 조르지오 아르마니였지만, 그는 바스키아의 아르마니를 사랑했다.

“그가 아르마니 수트를 선택해서 좋다. 그리고 내 수트에 그림을 그린 것은 더욱 마음에 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옷을 디자인한다. 바스키아는 이를 확실히 해냈다.” – 조르지오 아르마니

1985년 2월 발간된 뉴욕 타임즈의 표지를 장식한 장 미쉘 바스키아. 그는 역시나 페인트로 뒤덮인 아르마니 수트를 선택했다. 촬영 당시 사진작가와 에디터가 신발을 권했지만 그는 맨발을 지켜냈다.

두 번째, 이세이 미야케

이세이 미야케와 함께 했던 바스키아의 1983년. 바스키아가 도쿄에 방문했을 때, 이세이 미야케의 제안으로 그는 사진작가 사카노 유카타와 함께 스튜디오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는 촬영 내내 주도권을 쥐고 즉흥적으로 포즈를 취했다. 서로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몸짓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후 바스키아는 1985년 한정으로 출시되었던 이세이 미야케의 선글라스 ‘IM-101’을 선택했다. 하나의 선과 두 개의 원이 만난 디자인. 오리지널의 프로토타입과 설계가 남아있지 않아 바스키아가 착용했던 사진을 토대로 복각 모델을 제작했다. 당시 이세이 미야케를 이끌었던 디자이너 타카하시 유스케가 도쿄 하라주쿠 갤러리에서 공개된 <장 미쉘 바스키아의 이세이 미야케 선글라스>를 발견한 것.

이는 사진작가 헨리 루트와일러가 남긴 것인데, 그의 사진 속에는 바스키아의 흔적과 온기가 남아있다.

세 번째, 꼼 데 가르송

바스키아의 옷장 속 또 다른 브랜드, 꼼 데 가르송. 뉴욕 꼼 데 가르송에 늘 드나들던 그는 꼼 데 가르송의 블랙 코트를 가장 즐겨 입었다고. 그리고 애정을 드러낸 바스키아에 레이 카와쿠보는 자신의 세계로 초대했다. 1987년 S/S 꼼 데 가르송 쇼에 그를 모델로 초대한 것. 바스키아는 파리에서 열린 꼼 데 가르송 런웨이에 올랐다. 그렇게 모델 장 미셸 바스키아가 탄생했다.

꼼 데 가르송을 사랑하고, 그로부터 사랑받았던 바스키아는 이듬해 사망했다. 그러나 꼼 데 가르송은 그가 사망한 후에도 줄곧 바스키아의 작품이 프린팅된 컬렉션을 공개하고 있다. 2018년 F/W 시즌에서는 바스키아 헌정 컬렉션을 선보여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비극적이고 짧았던 장 미쉘 바스키아의 삶은 불과 27년이었다. 하지만 사후 36년, 여전히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바스키아는 불꽃처럼 살았다. 밝게 타오른 뒤 불은 꺼졌다. 그러나 불씨는 여전히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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