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추앙받던 케이트 스페이드는 어쩌다 몰락의 길을 걸었는가. 시그니쳐였던 나일론 백은 90년대 미국을 지배하며 유럽에서 건너온 샤넬, 펜디의 핸드백보다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당시 케이트 스페이드 백을 든다는 건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할 정도였으니, 브랜드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가는가?
캐서린 노엘 브로스나한
케이트 스페이드는 1962년 ‘캐서린 노엘 브로스나한’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케이트는 잡지사 ‘마드모아젤’에서 5년간 패션과 액세서리를 담당하며 수석 패션 에디터의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1991년, 그녀는 마드모아젤의 패션 디렉터 자리를 뒤로하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떠났다.
케이트는 세련되고 실용적인 핸드백에 갈망을 느꼈다. 자신의 옷장을 볼 때마다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 것이다. 당시 핸드백은 화려하고 복잡한 디자인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 단순한 디자인을 추구했던 케이트는 유명 디자이너의 가방 대신, 늘 빈티지 가방 혹은 스트로 백을 들었다. 결국 완벽한 가방을 스스로 디자인하기로 결심했지만, 디자인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케이트였다.
나는 종이로 시작했다
패션에 대한 안목은 있었지만 제작 과정은 미처 몰랐던 케이트. 그녀는 큰 종이를 원하는 모양대로 잘라 테이프로 붙여 가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작정 패턴사를 찾아갔다. 그녀는 유명 패션 스쿨 출신이 아니었기에 부끄러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패턴을 만든 후에는 원단 공급업체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100야드 미만의 적은 수량의 원단을 판매하려는 업체는 없었다. 케이트는 단 여섯 개의 가방을 만들고자 했기에 20야드 정도의 원단을 필요로 했기 때문.
마침내 연락이 닿은 곳은 감자 포대자루를 제작하는 회사였다. 그들이 삼베를 판매하겠다고 한 것이다. 라피아 프린지와 웨빙 핸들이 달린 삼베 소재의 가방. 이것이 케이트 스페이드의 첫 번째 컬렉션이었다. 그리고 트레이드 쇼 전날 밤, 가방 안쪽에 부착했던 ‘케이트 스페이드 뉴욕’ 라벨을 떼어내 가방 바깥쪽에 꿰매어 가방을 완성한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앤디 스페이드’의 성과 캐서린의 애칭, ‘케이트’를 딴 브랜드명이었다.
케이트 스페이드는 삼베로 제작한 첫 번째 컬렉션으로 뉴욕 트레이드 쇼에 선다. 그리고 LA의 편집샵 ‘프레드 시갈’과 ‘바니스 뉴욕 백화점’에 첫 제품을 판매한다. 하지만 겨우 부스 비용을 충당할 정도의 수익에 불과했다.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저조한 판매량에 사업을 접길 고려한다. 케이트 스페이드의 가방은 판매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잡지에 자주 소개되며 관심을 끌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일을 그녀가 했기 때문일까. 케이트가 참석했던 세계 최대 규모의 섬유 박람회인 ‘파리 프리미에르 비죵’에서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던 삼베 소재의 가방이 에디터들의 눈에 띄었다.
“케이트 스페이드는 전 세계 여성들이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는 부러울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
Happy Go Lucky
1996년, 마침내 케이트 스페이드는 CFDA(Council of Fashion Designers of America)에서 액세서리 부문 신인 패션 인재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한다.
케이트 스페이드는 고가의 유럽 기반 브랜드 사이에서 젊은이들이 접근하기 쉬운, 일상적인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세련되지만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가격대로 진입 장벽을 낮추고, 화려하지 않은 심플한 디자인이기에 일상에서도 쉽게 매치할 수 있어 미국의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녀의 미소와 함께 선보이는 케이트 스페이드 컬렉션의 다채로운 색상 팔레트는 ‘Happy Go Lucky(낙천적인)’라는 슬로건 하에 긍정적이고 밝은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2018년, 케이트 스페이드는 우울증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녀가 떠난 케이트 스페이드
1999년, 스페이드 부부는 케이트 스페이드의 지분 56%를 니먼 마커스 그룹에 매각한다. 이 거래를 통해 케이트 스페이드는 뷰티, 주방용품 등 다양한 카테고리로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후 2006년에 나머지 44%의 지분마저 모두 매각한다. 이듬해에는 니먼 마커스 그룹이 ‘리즈 클레이본’에 브랜드를 팔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스페이드 부부는 케이트 스페이드를 떠난다. 그리고 딸 프랜시스 스페이드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겠다고 선언한다.
케이트 스페이드의 죽음
10년 뒤 케이트는 앤디 스페이드와 별거 생활을 한다. 그녀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남아 있었는데, 항간에서는 앤디가 이혼을 요구해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추측이 분분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이혼에 대해서는 논의한 적은 없다고 밝힌 앤디. 그에 따르면, 케이트는 6년 전부터 우울과 불안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당일에도 행복한 모습이었다고.
그녀의 언니 레타 사포는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고 언급했다. 케이트 스페이드는 브랜드의 이미지가 훼손될까 우울증 치료를 거부했던 것. 언제나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었던 그녀와 브랜드의 이미지 뒤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