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8일,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 언더그라운드 힙합 DJ ‘누자베스(NUJABES)’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소식이 전해지기 20여 일 전이었던 2010년 2월 26일, 그는 심야 도쿄도 미나토구내의 수도고속도로를 지나고 있었는데 돌연 교통사고가 발생했고, 급하게 병원으로 호송됐지만 멈춘 심장이 다시 뛰는 일은 없었다.
사망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는데, 이는 가족들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죽음은 음악업계를 슬픔에 빠트렸다. 동료들은 일제히 그를 추모하는 글과 영상을 업로드했고, 그와 관계가 없는 전 세계 수많은 음악인들이 곡과 가사, 영상 및 글을 통해 추모에 동참했다.
야마다 준
누자베스, 본명 야마다 준. 그는 197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여느 천재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즐겼다.
하지만 대학은 디자인 전공으로 입학했다. 사진과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더 깊게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이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는 대학을 중퇴한다. 당시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자퇴, 그리고 음악
대학을 때려친 야마다 준, 그는 시부야에 레코드샵을 오픈했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기에, 자기만의 취향이 확고했고, 레코드샵 셀렉션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오픈한 ‘Guinness 레코즈’는 곧 시부야 음악 애호가들의 성지가 됐다. 업계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도 샵을 찾아왔고, 그들과 교류하며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외에도 그는 여러 클럽을 오가며 열심히 사람들을 만났고, 이 과정에서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 ‘하시모토 토오루’를 만나게 된다.
하시모토 토오루
그는 야마다 준에게 기회를 줬다.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Suburbia Suite’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 이를 통해 야마다 준은 활동명 세바 준, 거꾸로 읽어서 ‘누자베스(NUJABES)’를 사용하게 됐다.
이후로도 둘은 함께하며 여러 활동을 함께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바 준은 음악보다 사진과 디자인 작업을 담당했다. 전공을 살려 동료들이 의뢰하는 앨범 커버 아트 작업 등을 진행한 것.
그렇게 클럽을 드나들도 여러 DJ 아티스트들을 만나 함께 작업하던 그는 1998년에 돼서야 비로소 자신의 독립 레이블 ‘Hydeout Productions’를 설립했다. 이때부터 누자베스의 역사가 시작됐다.
누자베스
독립 레이블을 설립한 누자베스는 즉시 음악 작업에 돌입했다. 같은 해에 36개 트랙으로 구성된 믹스테이프를 발매하며 시작을 알렸다. 이 앨범은 ‘NUJABES’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된 앨범이었다.
탄력을 받은 누자베스. 1999년에는 또 다른 전설적인 뮤지션 ‘Funky DL’과 협업하여 앨범 [Please Don’t Stray]를 발매했다. 뿐만 아니라 Substantial을 일본으로 데려와서 함께 협업했는데, 데뷔 앨범 [To This Union A Sun Was Born]의 완성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로 두 뮤지션은 누자베스와 절친한 사이가 됐고, 꾸준히 협업을 이어나가게 된다.
다 모여, 앨범 내자
이처럼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고, 협업을 이어왔던 누자베스는 2003년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매하기 위해 그동안 협력했던 이들을 모두 모았다.
Funky DL, Substantial, Shing02, L-Universe 등 여러 아티스트가 그의 부름에 답했고, 28곡으로 구성된 앨범 [Hydeout Productions 1st Collection]이 공개될 수 있었다.
그는 같은 해에 본인의 개인 작업실에서 녹음한 스튜디오 앨범 [Metaphorical Music]까지 발매했는데, 이 앨범은 현재 컬트적인 인기를 유지하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나서지 않는다
이후로도 꾸준히 작업물을 발표하며 언더그라운드 씬의 거물이 된 누자베스. 하지만 그는 이렇다 할 홍보활동을 하는 등 언더그라운드를 벗어나기 위해 힘쓰지 않았다. 그저 완벽주의자로서 작업에 열중하며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사실, 나설 이유도 딱히 없었다. 말이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지, 그의 앨범은 발매될 때마다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대부분의 앨범이 없어서 못 살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워낙 음악적인 스타일이 확고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를 추종하는 마니아들이 있었기에 그는 마음 편히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정말 갑자기
그렇다. 그의 죽음은 정말 갑자기, 그렇게 찾아왔다. 36살 생일을 막 지난 참이었다. 로파이 힙합의 기초를 다지고, 힙합과 재즈, 일렉트로니카, 클래식을 자유자재로 조합하던 천재 아티스트가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떠났다.
“갑자기, 정말로 갑자기, 슬픈 소식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됐습니다. 하이드아웃 프로덕션의 누자베스는 2010년 2월 26일 심야 도쿄도 미나토구내의 수도고속도로를 빠져나오는 지점에서 돌연 교통사고로 인해 구급차로 시부야구내의 병원에 호송돼 구명조치를 받았으나, 다시 심장 고동을 되돌리는 일 없이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36살의 생일날을 맞이하자마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장례는 누자베스의 음악과 함께 가족들만의 밀장으로 조용히 행해졌습니다. 이 곳에 생전의 후의에 감사해 삼가 통지합니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매일 슬픔과 분함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누자베스가 지금까지 세상에 내보낸 여러 음악은 음악을 향한 깊은 애정, 재능 있는 선구자들에게의 존경하는 선구자들에의 존경, 자유로운 정신과 흘러넘치는 독자성, 듣는 사람의 감정을 흔드는 최선의 음악 영감까지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높이기 위해 자기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하나하나의 음악을 쉽게 만들어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추구하고, 매일 열심히 노력을 더해왔습니다.
다행히도 누자베스가 계속해 온 미발표 음원이 스튜디오에 남아 있습니다. 하이드아웃 프로덕션으로서는 앞으로 이 누자베스의 메시지를 동지인 우야마 히로토 등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전달하고 싶습니다.
팬 여러분, 관계자 여러분에게는 지금까지의 응원을 깊이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누자베스의 음악을 소중히 애청해 주시기를 마음속 깊이 부탁드립니다.”
2010년 3월 18일 – 하이드아웃 프로덕션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음악은 여전하다. 2010년대 로파이 힙합 열풍이 불며 그가 남긴 작업들도 주목받기 시작했고, 지금은 음악을 즐기는 모두가 아는 이름이 됐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진다. 소파에 누워 스피커 볼륨을 키워보자. ‘Letter from Yokosuka’. 창문이 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