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을 둥둥 울리는 드럼 사운드 위에서 뛰노는 색소폰의 선율은 뾰족하게 들어와 뇌리에 박힌다. 재즈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담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블루 자이언트>는 예측할 수 없는 재즈의 맛을 보게 한 작품. 도쿄 최고의 재즈 클럽, ‘쏘 블루’에 입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세 뮤지션의 땀 방울은 한순간에 관객들을 재즈의 세계로 인도한다.
꼭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진정한 음악을 맛본다면 그 여운은 가슴속에 짙게 남기 마련.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필자는 도쿄를 찾았다. LP 스토어부터 악기 상점, 재즈 바까지. 음악을 사랑하는 당신이 도쿄에서 꼭 가 봐야 할 만한 곳들을 소개한다. 당장 도쿄 여행 계획이 없더라도, 후기를 보고 나면 비행기 티켓을 끊게 될지도 모르니 주의.
오차노미즈 Guitar Planet
오차노미즈 역에서 나와 악기 상점으로 가득한 거리로 들어오면 곧바로 4층짜리 기타 플래닛이 우리를 반긴다. 북적한 인파 속에서도 친절함을 잃지 않는 직원들 덕에 기분 좋아지는 곳. 지하 1층은 일본에서 생산한 기타를, 1층에서는 유명한 브랜드의 기타들과 액세서리를 판매한다. 2,3층은 각각 펜더와 깁슨의 커스텀 샵으로 꾸려져 있는데 가격대는 꽤 높은 편.
입문자라면 1층만 확인해도 충분하다. 어깨를 무겁게 하는 큰 기타를 한국까지 메고 갈 의지가 없다면 액세서리만 쇼핑해도 좋다. 에스닉한 패턴을 자랑하는 깁슨의 레더 스트랩은 기타를 잘 치지 못하는 입문자들이라도 혹할 만한 비주얼. 여느 악기 상점과 동일하게 원하는 기타를 시연해 볼 수 있다.
오차노미즈 Disk Union Soul Rare Groove CD Record Shop
악기를 충분히 구경했다면 근처에 있는 디스크 유니온에 들러 귀를 황홀하게 만들어 줄 차례다. 디스크 유니온은 장르별로 지점이 나누어져 있다. 필자가 방문한 곳은 소울 음악이 많은 오차노미즈 지점. 문을 열면 바로 발견할 수 있는 LP용 책장은 방문객들이 얼마나 음악에 진심인지 보여준다. 그 위로 올라가면 음악 관련 서적과 CD, 굿즈가 가득 찬 매장이 등장한다.
국내에서도 개봉한 재즈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의 음반과 굿즈도 판매하고 있다. LP만을 모아놓은 곳은 따로 있는데, 사람이 붐비는 시간대에 방문하면 그야말로 ‘보물 찾기’ 전쟁이다. 재즈, 소울, R&B도 많지만 곳곳에서는 일본에서만 한정 판매된 음반이나 시티 팝도 발견할 수 있다. 이왕 일본까지 날아왔다면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아이템들을 건져가 보는 건 어떨까.
시모키타자와 General Record Store
디스크유니온보다는 조금 더 힙하고, 조금 더 작은 이곳. 시모키타자와역 부근에 위치한 제너럴 레코드 스토어는 단골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오디오 테크니카의 ‘사운드 버거’ 플레이어, 스토어와 뮤지션들의 굿즈, 각종 음악 관련 팸플릿 등이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이곳은 일본 뮤지션들의 음반을 굉장히 많이 구비하고 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알려주지 않았던 일본 뮤지션을 발굴해 보고 싶다면 꼭 들러야 할 곳. 심지어는 ‘오키나와’라는 섹션도 있다. 가격 역시 합리적.
시모키타자와 City Country City
뱃속은 요동치지만 음악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포기할 수 없다면 시티 컨트리 시티를 방문해 보자. 파스타와 LP, 커피를 함께 판매하는 젊은 손님들의 방앗간. 공간을 은근하게 채우는 매력적인 음악은 주인장의 안목에 신뢰도를 더한다. 한쪽 구석에 마련된 청음 공간과 ‘입문자 섹션’, ‘100엔 섹션’ 등 친절하게 나눠진 매대는 LP를 콜렉팅에 입문한 이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하는 요소.
자리에 앉아 일본어로만 되어 있는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니 점원이 영수증 뒷면을 활용한 ‘간이 영어 메뉴판’을 건넸다. 바 테이블 안쪽에서는 작은 주방에서 쉴 새 없이 파스타 접시가 오가는데, 그중 대부분이 핑크빛을 띤 소스를 머금고 있었다. ‘명란이다!’ 고민 없이 주문한 명란 파스타는 녹진한 명란 소스 위에 느끼하지 않게 토마토를 조각내 얹은 채 등장했다.
묵직하게 입안을 감싸는 파스타 맛은 지금 내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맛. 토마토가 애써 느끼함을 방어해 주지만, 부족할 수 있으니 탄산음료를 함께 주문할 것을 추천한다. 점심시간대에 방문하면 꽤나 긴 대기 줄을 견뎌야 할 수도 있으니 되도록이면 오픈 시간에 맞춰 방문하자.
신주쿠 DUG Jazz Cafe & Bar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라면 꼭 들러야 하는 신주쿠의 재즈 바 DUG.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도 등장하는 곳이다. 어둑한 지하로 들어서는 순간 들려오는 재즈 음악 소리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동시에 폐를 가득 채우는 담배 연기는 비흡연자들에게 고통이 될 수도.
바 테이블에 앉아 술 한 잔과 음악을 즐기는 중장년의 단골손님들은 이곳의 세월을 짐작게 한다. 저녁 6시 30분 이후부터는 ‘바 타임’으로 책정되어 입장료를 내야 하니 참고. 필자의 추천 메뉴는 담배 모양을 한 시나몬이 함께 나오는 밀크티다.
시부야 Grandfather’s
40년째 시부야의 지하에서 록, 펑크, 소울 음악을 틀고 있는 할아버지의 재즈 바. 어둑어둑한 이곳에서 세심하게 선정된 음악과 위스키 한 잔을 즐기고 있다 보면, 어느새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온 듯한 기분까지 느껴진다.
음악 선정도 기가 막히지만 무엇보다 분위기가 그야말로 미쳤다. 하지만 방문 시간을 잘못 맞춘다면 주인 할아버지는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들의 역사가 쌓인 LP 컬렉션은 그대로이니 헛걸음을 한 셈은 아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