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동의 ‘망리단길’ 신용산역의 ‘용리단길’ 송파구 잠실의 ‘송리단길’. 한국에는 수많은 ‘X리단길’이 있다.
이유는 뭐 간단하다. ‘X리단길’의 원조 이태원의 ‘경리단길’이 엄청난 인기를 누렸기 때문. 다른 지역 리단길은 지역의 이름에서 하나씩 떼와서 붙였는데, 경리단길의 ‘경’은 어디서 가지고 온 것일까.
‘경’은 다른 동네처럼 붙인 것이 아니다. ‘경리단(經理團)’이 있는 길이었기에 이름 그대로 ‘경리단길’이 된 것이다.
‘경리단(經理團)’은 용산 기지에 위치한 ‘국군재정관리단’의 옛 명칭 ‘육군중앙경리단’, 즉 국군의 재정을 관리하던 부대다. 경리단 뒷골목에 숨은 고수들의 아지트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핫플레이스가 된 경리단길. 도로명처럼 쓰이다 보니 이런 유래를 아는 사람은 매우 적을 것. 실제 도로명은 당시 군부대 이름이라 보안상의 이유로 ‘회나무로’를 사용했다.
‘녹사평대로’와 ‘회나무로’에 걸쳐 뜨거운 관심을 받고,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던 골목길. 사람들은 왜 경리단길로의 발걸음을 멈췄을까.
느낌 좀 안다면 경리단길을 찾았다
국군재정관리단의 정문에서부터 오르막길로 이어지는 경리단길. 2010년대 초 거리에 실력 있는 셰프들의 분위기 좋은 식당이 하나씩 늘어섰다. 인근에는 용산 미군 기지도 있었다. 미군들의 시각적 입맛에 맞는 예쁜 카페들도 군데군데 있었다.
근대 한국의 정겨운 모습과 이국적인 요소들이 곳곳에 어우러져있는 거리를 걷다 보면 오묘한 기분이 든다. 그게 경리단길의 맛이다.
수제 맥줏집 ‘크래프트웍스’, ‘브루어리’ 그리고 ‘장진우식당’.
‘분위기 좋은 카페’를 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오르막길도 오를 수 있었다. 작지만 개성 넘치는 가게들은 경리단길 팬을 만들어냈다.
경리단길에 있는 홍석천의 가게에서 홍석천을 만나는 날은 행운의 날이었다고.
한국과 외국이 감성이 섞인 거리 분위기에 맛있는 식당, 카페까지. 경리단길은 단숨에 힙스터들의 ‘나만 아는 곳’이 되었고 입소문을 타면서 놀러 나가면 꼭 들러야 할 거리가 되었다.
여기는 진짜라고 생각했는데
경리단의 뒷골목은 대기업이 자리 잡기는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좁은 골목에 오르막길까지 있는 길이 접근성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갈아엎지 않는 이상 건물이 새로 들어올 공간도 부족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젠트리피케이션’에서 조금 자유로운 곳일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경리단길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상권이 망해버린 대표적인 거리가 되었다.
워낙 유명해진 탓에, 경리단길에는 비슷비슷한 콘셉트의 가게들이 늘어났다. 기회를 포착한 건물주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고, 임대료를 빠르게 올렸다. 경리단길 건물들의 시세도 함께 올라갔지만, 매수자들은 활발한 상권에 높은 임대료로 이를 상쇄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경리단길 가게들은 이를 버티지 못했다. 감당할 수 없는 임대료에 하나둘씩 독립 가게들이 경리단길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특별할 것 없는 거리에 사람들은 갈 필요가 없어졌다고.
상권은 빠르게 무너졌다. 떠나버린 사람들, 상가를 공실로 둬야 하는 건물주들. 누구 하나 웃을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다.
다시 사람 사는 동네로
10평짜리 상가 월세가 700만 원까지 치솟았던 경리단길은 2019년 26.5%의 공실률로 서울 지역 공실률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망한 거리’가 아니라 다시 사람 사는 동네가 된 셈이다. 원래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던 주택가였으니. 지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리단길의 상권은 잃었다. 장바구니를 끌고 동네 슈퍼 마트로 장 보러 가는 사람들, 학교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집으로 향하는 어린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화려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많다. 청춘은 다시 오지 않기 때문. 불타는 2010년대를 보냈던 사람이라면 경리단길 1층마다 붙어있는 ‘임대 문의’에 마음이 아플 것이다.
여러 ‘X리단길’을 만들어냈던 경리단길. “나 때 경리단길은 그랬지”라는 회상에 힘입어 다시 빛을 보는 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보지만 지금 경리단길이 주는 ‘동네’ 바이브는 정말 어린 시절 살던 동네를 떠오르게 만들어 가슴 한편 이 뭉클해진다.
갈만한 곳 아직 있을까?
당연히 있지. 놀 줄 아는 에디터가 ‘X리단길’의 원조, 경리단길에서 뭐 하고 놀지 소개한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숨은 고수들이 많다. ‘눈요기’, ‘귀요기’, ‘배 허기’까지 한 번에 채워주는 경리단길 코스로 사랑하는 이와 이번 주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불필요상점
불필요상점은 예약제로 운영되는 빈티지 소품샵이다. 2017년부터 경리단길에 뿌리내린 지 7년. 분위기 살피러 먼저 방문한 인스타그램에서부터 사장님의 경리단길 사랑이 느껴진다. ‘옛날 거 파는 가게’. 생활에는 불필요하지만 삶에는 필요한 것들을 파는 불필요상점부터 경리단길을 시작하자.
📍 서울 용산구 녹사평대로46길 16-5
⏰ 워크인 및 예약 방문 매주 인스타그램 공지 @6feetunderseoul
떠그클럽 플래그십 스토어 및 녹지정 공원
대한민국 스트릿 패션씬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패션 브랜드 떠그 클럽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경리단길에 있다. 그 앞에는 떠그 클럽 디렉터 조영민이 직접 팀원들과 구상한 공원이 마련되어 있다. 사진으로만 보던 제품을 실제로 느껴보고 공원에서 쇼핑하느라 힘들었던 다리에게 휴식 시간을 제공하자.
📍 서울 용산구 회나무로 46
⏰ 13:00 – 21:00 (월요일 휴무)
여수댁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오래간만에 놀러 나왔는데 술이 빠질 수 없지. 경리단길 노포집을 찾는다면 여수댁을 추천한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 덕자찜이 술을 부르기로 그렇게 유명하다고. 경리단길의 특징인 이색적인 거리 곳곳에 있는 노포 감성을 여수댁에서 제대로 느끼고 가자.
📍서울 용산구 녹사평대로52길 17
⏰ 16:00 – 03:00
뮤직펍 펫사운즈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 용산이라면 펍이 빠질 수 없다. 매주 아티스트를 콕 집어서 음악을 트는 뮤직펍 펫사운즈에서 음악에 취하기까지. 종종 소규모로 공연을 진행한다. 음악과 술, 음악 취향까지 비슷한 사람이 모인 펫사운즈라면 모르는 사람이 곧 베스트 프렌드가 될 수도 있다. 자유로운 영혼이 가득한 이태원의 마지막은 음악으로 끝내보자.
📍 서울 용산구 회나무로 21 3층
⏰ 17:30 – 02:00
경리단길은 누군가의 추억이 짙게 담겨있을 터. 다시 간다면 이전과 다른 경리단길의 모습 앞에 과거의 경리단길이 겹쳐 보일 것이다. 과거의 영광은 누리지 못하고 있지만, 오히려 좋다. 쾌적한 환경에서 오붓한 시간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 녹사평역부터 시작하는 데이트 코스. 오랜만에 경리단길로 발걸음을 옮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