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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로

광복을 향한 이들의 숭고한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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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년 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로 공식 출범하게 된다.

임시정부의 주축이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호 ‘도산’은 도산공원이 있는 곳에 도산대로라는 지명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또 다른 주축, 김구 선생도 그렇다. 백범 김구 선생의 호 ‘백범’은 원래 도로명으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1984년이 되어서야,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는 그를 기리기 위한 지명이 용산구에서 마포구에 이르는 가로에 제정됐다. ‘백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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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7대 국무령부터 제11대 국무 위원회 주석으로 재임했던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알아보자.

골목대장 김창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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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의 집안은 방계 조상이었던 김자점이 처형당한 후 양반 신분을 숨기며 살았다. 청년 양반에게 집안 어른이 하대 받을 정도로 몰락한 집안이었다고.

백범은 어릴 적에 창암이라고 불렸다. 창암은 한 덩치 하는 소년이었다. 동네 골목대장을 때려눕히고, 서로 대장이 되려고 틈만 나면 싸웠다고 한다. 아버지 놋숟가락을 분질러 엿 바꿔 먹고, 어머니의 염색 물감을 빨래하는 냇가에 풀어버리기도 하는 골칫거리 창암은 어머니에게 종아리 맞는 게 일상이었다.

철이 든 김창수,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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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형편에 글 공부를 했지만, 과거 제도 폐지로 시험공부를 중단했다. 그렇게 주변의 권유로 관상을 공부했더니, 자신의 얼굴이 관상학에서 꽤나 나쁜 얼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바로 걷어치워버렸다.

18세, 창암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별하여 대하지 않는다는 동학에 빠졌다. 그렇게 동학에 입문해 ‘김창수’로 이름을 개명하고, ‘아기 접주’라는 별명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해 동학군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같은 동학교도들끼리 싸움이 일어났고, 그의 선배 영장 이용선이 죽게 되어 충격을 받았다. 자신도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안중근의 아버지 안진사의 도움으로 겨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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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빠진 창수는 이후 ‘고능선’이라는 사람을 만나 마음을 다시 잡고, 청나라로 유학을 떠나 조선 역사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켰다.

“누구든지 이 왜놈을 위해 내게 달려드는 자는 모두 죽이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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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조선인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21세의 김창수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황해도 치하포 한 주막에서 일본인 상인 ‘쓰치다 조스케’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고, 사형수가 되었다. 이 사실을 안 고종이 뒤늦게 김창수의 사형 집행을 중지시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방랑하던 김창수은 승려의 신분으로 경기도부터 전라도까지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힌다. 한층 성숙해진 김창수은 ‘최준례 여사’와 결혼을 하고 신민회에 들어간다.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암살 시도 실패와 신민회 사건이 터지며 한 번 더 유치장에 투옥된다.

유치장에서 왜놈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라가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그는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사는가에 대한 성찰을 통해 ‘김구’가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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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대장이 되려 싸움판을 벌였던 그는 도산 안창호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다고 청한다. 김구의 독립을 위한 행적을 알던 안창호 선생은 그를 경무국장으로 임명했다.

그의 아내가 둘째를 낳고 계단을 내려오다 심하게 낙상을 당했다. 그는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무료 병원이었던 홍구 폐병원에 입원한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병원이 일본 조계지에 있었기 때문에 아내가 죽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지 못했다.

독립의 희망처럼 울려 퍼진 폭탄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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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돈이 없기는 매한가지. 그러나 김구는 일제를 타격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해야만 했으니까. 김구는 해외 동포들과 조금씩 돈을 모아 한인애국단을 결성했고, 조직에는 그 유명한 ‘이봉창 선생’과 ‘윤봉길 선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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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가 천황을 향해 던진 첫 폭탄은 폭살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의 희생은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열망에 불을 지폈다. 이후 윤봉길 선생도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 주요 인사들에게 폭탄을 투척해 의거를 성공시켰다. 당시 중국 국민당 총통 장제스는 이들의 노력에 막강한 지원을 했고, 독립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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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예로운 회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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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으로 옮긴 임시정부. 임시정부는 독립을 위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지만,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그 사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고, 강제 징집된 조선인 병사들이 탈출하여 충칭까지 건너왔다. 무리를 지어 도착한 이들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을 터. 이들은 한국광복군이 되었고 현 CSI인 미국 OSS와 함께 한반도 침투작전으로 광복을 준비한다.

그러나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인해 작전은 수행하지 못했다. 이에 김구는 아쉬워했다. 온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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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안의 골목대장 김창암에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김창수, 자신의 방황을 견뎌내고 성숙한 ‘김구’가 되기까지. 그는 끝없는 성찰을 통해 환경을 원동력으로 만들었고, 언제나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있었다.

백범은 <나의 소원>에서 말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보다는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고.

우리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다. 그가 한없이 가지고 싶다는 높은 문화의 힘은 우리의 자랑이 되었다. 진부하다고 이야기할 만큼 한국의 문화는 세계에서 힘을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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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대한 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들이 우리에게 영예로운 회복, ‘빛’을 되돌려 준 날이다. 흑백 사진 속 그들의 모습이 더욱더 자랑스러워지는 하루다. 

언제라도 백범로를 지나게 된다면, 그들과 함께 중심에서 나라의 힘을 위해 노력했던 김구 선생의 혼을 느껴보는 하루가 되어보자. 

광복 79주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숭고한 힘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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