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를 상징하는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 그는 1957년 10월 23일에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각자의 주장이 모두 다르기 때문. 공신력 높은 매체 <타임(TIME)>은 그가 카드 게임을 즐기다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심장 마비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일부 매체에서는 그가 식사를 하던 도중, 생선 뼈가 목에 걸려서 질식해 심장마비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설명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문은 또 있다. 그가 아주 격렬한 섹스를 즐기다가 심장 마비가 왔다는 소문도 있다. 아쉽게도, 그가 정확히 어떤 경위로 사망했는지는 아직까지도 공개되지 않았다.
디올의 스케치, 10센트에 판매합니다.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의 아름다운 마을 ‘그랑빌’에서 태어난 디올. 그의 집안은 부유했다. 비료를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업체 ‘모리스 디올’ 가문의 둘째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성장했다.
가족은 그가 외교관이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디올은 뻔한 직업에 관심 없었다. 그는 예술을 원했다. 가족은 미지근한 반응으로 그의 꿈을 대했고, 디올은 결국 스스로 꿈을 실현시키고자 집 주변에서 직접 그린 패션 스케치를 개당 약 10센트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가족도 그의 열정 앞에 무너졌다. 결국 아버지는 디올에게 작은 미술관을 운영할 수 있도록 돈을 손에 쥐여주었고, 디올은 곧장 학교를 나와 미술관을 설립했다. 그의 예술을 향한 열정과 실행력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규모는 작지만, 알찹니다
가족의 도움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디올의 미술관은 작지만 알차게 운영됐다. 동시대를 살았던 천재 화가 ‘피카소(Pablo Picasso)’의 작품도 판매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술관은 오래 운영되지 못했다. 애초에 사업의 규모도 작았지만, 경제 대공황이 길어지면서 그의 가족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 이 시기 디올의 어머니와 형제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가 운영하던 비료 사업 역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결과적으로 디올의 미술관은 문을 닫게 되었으니,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 세상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로베르트 피게 (Robert Piguet)
그가 선택한 길은 ‘취업’이었다. 패션에 대한 감각과 실력이 남달랐던 디올, 그는 미술관의 폐쇄 이후로 프랑스 유명 디자이너 ‘로베르트 피게(Robert Piguet)’ 밑에서 경력을 쌓아 나갔다.
그는 이곳에서 앞으로 인생을 함께 할 멋진 동료들을 여럿 만났다. 그중에는 훗날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설립하는 ‘피에르 발망(Pierre Balmaim)’, 그리고 디올이 사망하고 하우스의 책임을 이어받게 될 운명을 가진 ‘마크 보한(Marc Bohan)’이 있었다.
돈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디올이 편하게 자신의 꿈을 펼치는 걸 계속 방해했다.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 디올은 신체적으로 건강했기 때문에 징집되어 군 생활을 하게 됐다. 하지만 폭탄이 오고 가는 전장 속에서도, 디올의 창작욕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경제적인 이유로도 작업 활동을 이어갈 필요가 있었는데, 어쩔 수 없는 시대적인 배경 때문에 주로 나치 장교들을 위한 의상을 디자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올이 돈과 가족,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나치 장교들의 의상을 디자인하는 동안, 그의 여동생이었던 ‘캐서린(Catherine)’은 프랑스 레지스탕스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해야만 했다.
디올 하우스의 탄생
길었던 전쟁도 끝을 맞이했다. 1945년 5월 해방을 맞아 캐서린은 풀려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46년 12월 8일에 디올은 ‘마르셀 부삭(Marcel Boussac)’의 후원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건 하우스를 설립했다.
여성의 신체를 탐구했다
하우스를 설립한 디올, 그는 프랑스 패션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갔다. 여성의 신체를 깊게 탐구했던 그는 ‘뉴룩(New Look)’을 탄생시켰다. 뉴룩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실루엣을 보여줬는데, 둥글게 떨어지는 어깨 실루엣과 여성스러운 가슴을 강조하는 패턴과 풍성하게 펼쳐진 스커트, 강조된 허리가 가장 큰 특징.
디올의 뉴룩은 전쟁으로 인해 지쳐있던 패션계에 활력을 불어 넣었고, 아름다움을 잊고 있던 국민들에게 미를 추구하는 즐거움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진실은 무엇인가
그렇게 프랑스 패션의 상징이 된 크리스티앙 디오르, 그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며 프랑스를 슬픔으로 덮었다.
그는 1957년 10월 23일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죽음의 이유는 의문에 싸여있다. 각 매체마다 주장하는 사망의 이유가 다르기 때문. 공신력 있는 매체 <타임(Time)>은 그가 카드 게임을 즐기다가 갑자기 찾아온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하지만 다른 매체 보도에 따르면 그가 식사를 하던 도중, 생선 뼈가 목에 걸렸고, 질식으로 인해 심장마비가 왔다고 한다.
다른 소문도 있다. 그가 여성의 신체를 격렬하게 탐구하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 어떤 보도가 사실인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정확한 사망 경위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그의 죽음을 기렸다
디올의 장례식은 국가 행사와 맞먹을 정도로 큰 규모로 진행됐다. 장례식에 참석한 인원수만 무려 1만 명에 가까웠다. 2천 명의 조문객은 마치 패션쇼에 참석한 것처럼 배정받은 좌석에 앉았고, 밖에는 7천여 명의 사람들이 두발로 선채 그의 죽음을 기렸다.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피에르 베르제(Pierre Berge)’는 디올의 장례식을 이렇게 회상했다.
“전국적인 행사였습니다. 마치 프랑스가 더 이상 살기를 멈춘 것 같았습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장례식은 사실상 국가 장례식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꽃이 보내져서 저녁이 되자 디올 하우스는 모든 꽃을 에투알 광장으로 가져갔죠. 디올의 관이 그가 묻힌 바르 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꽃을 안고 있는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도시와 마을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
그의 제자이자 어린 나이로 디올 하우스의 운명을 책임지게 된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Yves Saint Laurent)’는 “나에게 있어 디올과 함께 일하는 것은 마치 기적이 일어난 것과 같았습니다. 나는 그에 대해 끝없이 감탄했고, 그는 당시 가장 유명한 쿠튀르였으며, 독특한 오뜨 꾸뛰르 하우스를 설립하고 대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는 능력을 가졌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내 예술의 뿌리를 가르쳐 주었으며, 내 인생의 큰 부분을 그에게 빚졌습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그 옆에서 보낸 세월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