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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시드니에 돌아오지 않았다

오페라 하우스를 설계한 예른 웃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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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문득 시드니를 떠올릴 때, 오페라 하우스 없이는 도무지 상상할 길이 없다. 수많은 이의 뇌리에 스며들고 영원히 역사에 새겨진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 그런데, 이를 디자인하고 설계한 건축가 예른 웃손은 오페라 하우스 건설 중 호주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이 만들어낸 오페라 하우스를 끝내 마주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호주 정책의 변화로 이민자들이 늘어났고 경제 또한 급속도로 성장했다. 전쟁이 끝나자 수십 년간 안건으로만 남아있던 공연 시설 건설이 드디어 추진되었는데,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음악원의 지휘자 유진 구센스가 정부를 설득한 것이 오페라 하우스의 시작이었다. 20년간 미국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뒤 1947년 시드니로 이주한 그는 공연 시설의 부재에 대해 지적했다.

이후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총리 조셉 케이힐이 그를 지지하며 본격적으로 진행에 불이 붙었다. 모든 사람이 계층 혹은 배경에 상관없이 음악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유진 구센스의 신념에 동의한 것이었다.

1955년 베넬롱 포인트가 오페라 하우스의 부지로 선정되었고, 이듬해에는 설계를 위한 국제 공모전을 개최했다. 총 233개의 출품작이 전 세계에서 접수되었는데, 그중 르 코르뷔지에와 알바 알토, 필립 존슨,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그리고 미스 반 로에와 같은 세계적인 거장들도 지원서를 내밀었다. 그런데 이들을 제치고 덴마크의 건축가, 예른 웃손이 선정되었다. 그의 경력은 작은 주택 프로젝트 두 개를 실현한 것이 전부였다.

예른 웃손은 오렌지 껍질을 벗기던 중 오페라 하우스의 형태를 떠올렸다. 그가 제출한 열두 장의 도면은 혁신적이었으나, 공모전 규정에는 어긋나있었다. 흑백 도면에 금이 칠해져 있었고 투시도마저 없었다. 심사 기간을 놓친 에로 사리넨은 후보로 지명된 건축가들의 도안에 실망했고, 그중 예른 웃손의 도면을 발견했다.

에로 사리넨은 예른 웃손의 디자인을 천재적인 작품이라며 감탄했다. 그리고 돛이 떠오르는 이 오페라 하우스는 훗날 세계의 위대한 건물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에로 사리넨을 포함한 네 명의 심사 위원은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작성했다.

“매우 독창적이어서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는 디자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장점이 될 것이라고 절대 확신한다.”

1950년대 중반에는 모더니즘 양식이 건축 형태의 주를 이뤘다. 건축가들은 건물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을 선호했고, 형태보다는 기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출품작들이 유리 상자 형태를 띄고 있었다.

그러나 예른 웃손은 표현주의를 받아들였다. 오페라 하우스의 부지로 선정된 베넬롱 포인트의 항구 환경을 최대한 활용해 모든 각도에서 건물을 볼 수 있도록 디자인한 것이 특징이었다. 나란히 배치한 콘서트홀, 그리고 끝 위로 돌출된 쉘 지붕은 항구와 돛을 연상케하는 디자인. 이는 베넬롱 포인트의 특성을 살린 유일한 디자인이었다.

그의 디자인이 선정되던 해에 미스 반 로에가 설계한 미국의 시그램 빌딩이 뉴욕에서 건설되고 있었다. 이는 모더니즘 건축의 정점을 보여주는데, 예른 웃손의 디자인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 나간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건설이 시작되자, 예른 웃손의 경험 부족은 점차 드러났다. 그의 설계 도면은 개략적이었으며, 설계 비용 또한 완벽하게 산출되지 않았다. 그의 독특한 설계 개념과 공학적인 감각의 부재로 인해 수많은 회의가 진행되었다. 전례 없는 그의 방식에 새로운 기술과 재료를 찾아야만 했고 예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초기 예산은 700만 호주 달러였는데, 1억 200만 호주 달러가 쓰인 것이었다.

문제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총리 조셉 케이힐의 사망 이후였다. ‘오페라 하우스에 대한 감각을 갖추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새 정부. 예른 웃손이 테스트를 위한 프로토타입을 제작하기 위해 6만 파운드를 요구했고, 공공부문 장관 데이비스 휴스는 거절한다. 이에 예른 웃손이 그만두겠다고 협박하자, 데이비스 휴스는 기존 엔지니어들과 건설 업체에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의회에 참석해 예른 웃손이 사임했다고 발표한다.

이에 건축가 해리 세이들러, 작가 패트릭 화이트를 비롯한 1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예른 웃손의 복직을 요구한다. 무려 3천 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서가 총리 로버트 애스킨에게 전달되었지만, 오페라 하우스의 건설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자진 사퇴’라는 미명 하에 예른 웃손은 쫓기듯 시드니를 떠났다. 그는 결국 오페라 하우스의 3분의 2만을 완성한 채 호주를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타인의 손으로 완성된 자신의 작품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른 웃손이 회상하길, 그는 오페라 하우스에 대한 생각을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1973년, 마침내 시드니 베넬롱 포인트의 오페라 하우스가 완공되었다. 총리 로버트 애스킨은 예른 웃손이 개관식에 참석하길 바란다며 편지를 전했지만 그는 거절 의사를 밝혔다. 자신이 그 자리에 참석한다면 또다시 논란이 불거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는 오페라 하우스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페라 하우스의 건축가로 긴 시간을 보내며 이 목표만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2003년 예른 웃손은 건축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 상인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그의 손을 떠난 오페라 하우스는 4년 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어 영원히 역사에 남겨진다. 2006년에는 예른 웃손이 설계했던 부분이 증축되었는데, 개관식에는 그의 아들 얀 웃손이 대신 자리했다.

“아버지가 호주에 오기에는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오페라 하우스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는 창조자로서 이를 보고 눈을 감을 것입니다.”

하지만 2년 뒤 예른 웃손은 심장 마비로 숨을 거두었고, 그는 영원히 자신의 작품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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