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클래식을 논할 때,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기 마련. 가령 음악에서는 브람스나 쇼팽, 건축에서는 르 코르뷔지에와 같은 거장들처럼 말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시대의 대표적인 클래식으로 자리 잡은 이들. 하지만, 그 가치를 인정받기까지는 종종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다.
피에르 잔느레는 늘 사촌 르 코르뷔지에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대표작인 LC 시리즈 또한 피에르 잔느레와 샤를로트 페리앙이 함께 했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르 코르뷔지에 소파’로 기억한다. 피에르 잔느레 사후 30년, 드디어 르 코르뷔지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그 공로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1922년 파리에서 피에르 잔느레와 르 코르뷔지에가 함께 건축 사무소를 설립한다. 그리고 샤를로트 페리앙까지 함께 일하는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르 코르뷔지에는 나치 독일에 협력한 비시 정부를 따라갔지만, 피에르 잔느레는 파리를 떠나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며 자연스레 둘의 사이는 멀어졌다.
이후 인도의 찬디가르에서 둘이 재회할 기회가 찾아왔다. 영국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인도. 당시 인도 정부는 과거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찬디가르’를 계획한 것. 이는 인도 펀자브 주의 새로운 주도이자, 자유롭고 현대적인 도시의 상징이 될 터였다.
이는 원래 건축가 마이에이 노비츠키와 앨버트 마이어의 담당이었다. 그러나 노비츠키가 갑작스러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후, 영국의 건축가 부부인 맥스웰 프라이와 제인 드류가 대체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부부는 프로젝트의 규모에 부담을 느꼈고, 르 코르뷔지에를 설득해 선두에 세웠다. 그리고 르 코르뷔지에는 피에르 잔느레에게 건설 현장 감독 자리를 제안했다.
그렇게 피에르 잔느레 필생의 역작으로 남은 찬디가르 프로젝트는 그와 르 코르뷔지에를 주축으로 시작되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파리에 머물며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피에르 잔느레는 인도 찬디가르에 정주하며 수석 건축가 겸 도시 계획의 담당자로서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그는 행정 건물을 비롯해 법원과 극장 등의 공공시설을 설계하고, 이곳에서 사용될 가구를 디자인했다. 이 또한 도시 계획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는데, 가구점이 없었기에 이들이 직접 디자인해야만 했던 것이다. 피에르 잔느레는 인도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했다. 그는 덥고 습한 인도의 날씨를 고려해 통기성이 좋은 라탄 케인과 높은 습도에도 거뜬히 견딜 수 있는 티크와 로즈 우드를 사용했다. 또한 주로 좌식 생활을 하는 인도 사람들의 문화를 반영하여 대부분의 가구는 낮은 높이로 디자인했다.
피에르 잔느레는 장소와 그 용도에 맞게 여러 버전으로 가구를 디자인했고, 수천 개의 가구를 제작했다. 그의 가구들은 인도 전역의 공공기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삶의 아름다움과 편안함, 그리고 모두가 이를 평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인본주의적인 디자인을 추구한 피에르 잔느레. 그가 고안한 찬디가르 프로젝트는 단순한 건축과 가구 디자인을 넘어서, 인도의 빈민 지역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그는 디자인과 예술을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도모했다. 의자에 앉아 공공재를 이용하는 우리는 모두 평등하기 때문.
하지만 인도 사람들에게 공공기관의 가구는 평범하고 흔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피에르 잔느레의 가구란 관료적이고 지루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심지어 피에르 잔느레 사후 그가 제작한 가구들은 땔감으로 사용되기까지 했다.
찬디가르 산림부의 토목 기술자로 일하던 수레쉬 칸와르는 20년 동안 피에르 잔느레의 의자에 앉아 근무했다.
“의자가 아름답지는 않지만 사무실에서 사용하기에는 편리합니다.”
그는 의자의 가치를 10달러 정도로 추측했다.
1990년대 후반, 에릭 투샬룸을 비롯한 프랑스의 컬렉터들에 의해 피에르 잔느레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피에르 잔느레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찬디가르 길거리에서 겨우 몇만 원에 판매되거나 버려진 가구들은 경매장에서 수천만 원에 거래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며 피에르 잔느레 가구의 가치를 뒤늦게 인지한 인도 정부는 그가 남긴 유산을 보전하고자 규정을 강화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신청하고 주민들에게는 경매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찬디가르의 유산 가구 위원회’를 설립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무용한 정책이었다. 결국 인도 밖으로의 수출을 막아 피에르 잔느레의 가구들은 구하기조차 어려워졌다. 그의 손길이 닿은 가구들은 여전히 수천만 원을 치솟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찬디가르 프로젝트는 1965년 르 코르뷔지에가 사망하고, 이듬해에 피에르 잔느레가 사망하며 끝이 났다. 그저 기능에만 충실한 도구로 여겨졌던 피에르 잔느레의 가구들이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기까지 무려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득한 시간 속에서 살아남은 오리지널 작품은 몇 점 되지 않지만, 찬디가르 주민들을 위한 그의 고민과 흔적은 여실히 남아 있다. 모두가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 이는 피에르 잔느레가 남긴 가장 큰 유산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