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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괴짜, 그리고 찌질이입니다’ 라디오헤드

멋을 아는 사람들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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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음악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역사적인 밴드, 라디오헤드가 결성됐다. 그리고 밴드에 소속된 다섯 명의 구성원은 놀랍게도 학창 시절부터 친구였다. 

영국 옥스퍼드셔에 있는 애빙던 스쿨에 다니던 톰 요크, 조니 그린우드, 에드 오브라이언, 콜린 그린우드, 필 셀웨이는 서로 음악적인 영감을 주고받으며 학교 음악실에서 함께 작업을 이어 나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 ‘슈퍼밴드’로 성장하게 될 줄은. ‘라디오헤드(RadioHead)’라는 이름이 탄생하기 전, 멤버들은 ‘온 프라이데이(On Friday)’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으로 그룹을 결성했다. 학교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모여서 음악 작업 및 연습을 했던 추억에서 착안한 이름이었다. 다행히도, 메이저 활동을 진행하기 전에 새로운 이름으로 밴드명을 교체했다. 그 이름이 바로 미디어로부터 일방적으로 정보를 습득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진 ‘라디오헤드’다. 


자국 밴드를 무시해?

등장과 동시에 주목받는 밴드는 많지 않다. 물론 있겠지만, 손에 꼽는다. 라디오헤드 역시 처음으로 선보인 EP [Drill]은 큰 주목을 받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해 9월, 라디오헤드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이 담긴  싱글을 발매했다. 

“라디오헤드는 몰라도, ‘Creep’은 알지”라는 사람이 많다.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첫 EP 발매 후 선보인 싱글이 바로 ‘Creep’이기 때문이다. 처음 들어본다고? 들어보면 안다. 그래서 ‘Creep’이 라디오헤드의 곡들 중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작품이냐고? 아쉽지만 그건 또 아니다. 심지어 처음 ‘Creep’이 발매됐을 때는 오히려 너무 우울하고 감상적인 멜로디 때문에 혹평이 쏟아졌다. 그리고 다음 해, 심혈을 기울인 준비 끝에 데뷔 앨범 [Pablo Honey]를 발매했지만, 영국에서 안타까울 정도로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어디서 대박이 났다고? 

밴드와 소속사 EMI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그저 그런 밴드로 남게 되는 것이 두려웠고, 거듭된 실패에 멘탈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때, 예상치 못했던 소식이 들려왔다. 바다 건너 먼 나라 이스라엘에서 ‘Creep’이 국민들을 사로잡았다는 것. 그들은 즉시 이스라엘로 날아갔다. 

좋은 소식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또 다른 먼 나라인 미국에서 ‘Creep’이 대히트를 쳤다. 너바나의 사운드에 미쳐있던 미국인들의 귀에 ‘Creep’은 달콤하게 녹아들었고, 라디오헤드를 당장 미국으로 모셔오라는 요구가 솟구쳤다. 

맞다, 라디오헤드는 자국인 영국을 제외하고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데 성공했다. ‘Creep’이 수록된 1집 앨범은 당연하게도 불티나게 팔렸고, 덕분에 라디오헤드는 2집부터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게 됐다. 영국인은 영국 밴드 음악을 들어라

라디오헤드는 왜 자국에서 인기가 없었을까? 당시 영국은 ‘브릿팝’ 열풍이 불고 있었기 때문 라디오헤드처럼 우울한 노래를 부르는 밴드에게는 관심을 줄 여유가 없었다. 

영국은 미국을 장악한 밴드 너바나의 음악을 배척하고, 1960년대 사운드를 기반으로 새롭게 탄생한 밝은 분위기의 브릿팝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이러한 현상과 문화적 흐름에 라디오헤드는 코웃음 쳤다. 브릿팝 따위는 1960년대 음악의 카피 수준일 뿐이라며 무시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처럼 영국과 라디오헤드는 ‘상극’이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의 탄생

1995년, 라디오헤드는 2집 [The Bends]를 발매했다. 그들은 1집의 큰 성공 덕분에 앨범에 담고 싶었던 사운드를 마음껏 담을 수 있었다. 물론 부담도 컸다. 1집의 성공, ‘Creep’의 인기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작품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충족시켜야 했기 때문.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말해서 뭐 하나, 공개와 동시에 차트 순위를 갈아엎었다. 평단과 대중의 찬사가 동시에 쏟아졌다. 라디오헤드를 무시하던 영국까지도 2집을 듣고 태도를 180도 바꿨다. 이때부터 라디오헤드는 영국을 포함한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당당하게 올라섰다. 컴퓨터가 무서워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2년이 지난 1997년, 라디오헤드는 세상을 발작시킨 2집 [The Bends]를 뛰어넘는 괴물 같은 앨범, [OK Computer]를 공개했다. 라디오헤드의 세 번째 정규 앨범이었다. 

센세이셔널, 앨범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다.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두려운 존재의 등장과 세기말의 불안정함이 담긴 [OK Cpmputer], 라디오헤드는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밴드 음악에 섞어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표현했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도 라디오헤드를 상징하는 최고의 명반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말 그대로 승승장구

라디오헤드는 날아올랐고, 안정적인 비행을 이어나갔다. 모든 앨범이 비평가들로부터 광범위한 호평을 받았고, 그래미와 NME 상을 휩쓸었다. 콘서트를 열면 그들을 보기 위해 모여든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티켓은 매번 단 한 장도 남지 않고 매진됐다. 

큰 인기를 얻은 만큼 대중적인 사운드로 안정적인 인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지만, 라디오헤드는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2000년에 공개된 앨범 [Kid A]는 쇼킹 그 자체. 락 사운드에 재즈와 일렉트로닉, 재즈 사운드를 결합하는 놀라운 시도를 감행한 것. 톰 요크의 우울하고 몽환적인 보컬과 라디오헤드의 얼터너티브 한 사운드 위에 다양한 장르가 섞이자 처음 듣는 새로운 소리가 완성됐다. 원하는 만큼만 돈 내세요

라디오헤드는 음악적인 도전과 실험은 물론이고, 음반을 배포하는 방식에서도 혁신적인 실험을 진행했다. 때는 라디오헤드가 월드투어를 마치고 휴식기에 들어간 지 3년이 지난 2007년이었다. 심적인 변화로 기존에 소속되어 있던 대형 기획사 ‘EMI’를 나온 라디오헤드가 무소속으로 처음으로 공개하는 정규 앨범이었다. 

앨범의 이름은 [In Rainbows], 이 앨범은 이름처럼 새롭고 다채로운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라디오헤드는 클래식과 일렉트로닉을 넘어서 피아노와 첼레스타, 옹드 마르트노처럼 다양한 호리를 내는 악기들을 동원했다. 직접 앨범의 수록곡을 들어보면 피부로 느껴지는 신선함과 라디오헤드만의 분위기, 귀를 울리는 다채로운 사운드의 향연을 느낄 수 있다. 놀라운 점은 라디오헤드가 이 완성도 높은 정규 앨범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로 공개했다는 점이다. 물론 완전 ‘무료’는 아니었다. 유저들에게 돈을 낼 것인지, 혹은 무료로 다운로드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을 제시했다. 이 말인즉슨, 누구든 원한다면 돈을 내지 않고 무료로 앨범의 전곡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는 뜻. 

다른 음원 사이트에서는 앨범을 공개하지 않고, 단독으로 공개한 앨범의 홍보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전작이었던 앨범 [Hail to the Thief]의 수익을 뛰어넘었기 때문. ‘EMI’라는 대형 메이저 음반사가 작정하고 밀어줬던 전작의 수익을 별도의 큰 마케팅 없이 뛰어넘었다는 건 음악을 배포하는 방식에도 변화의 바람이 찾아왔음을 의미했다. ing..

역사에 기록될 밴드를 꼽으라면 언제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라디오헤드’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아직 그룹을 해체하지도, 은퇴를 선언하지도 않았기 때문. 소리 소문 없이 언제 갑자기 신보가 공개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학창 시절부터 이어져온 끈끈한 우정과 그간 주고받은 수많은 음악적 교감 덕분이었을까? 심지어 라디오헤드의 멤버 다섯 명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멤버 구성의 변동이 잦은 록 밴드의 특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 마지막 앨범 발매가 8년 전인 2016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곧 새로운 앨범을 마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인권문제와 환경문제를 꼬집는 행동과 가사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전파하고 있는 라디오헤드, 이들의 도전에 함께하고 싶다면 지금 바로 작품을 음원 사이트의 플레이 버튼을 클릭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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