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 슬리먼이 셀린느로 돌아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외쳐왔다.
“플레어 진 붐은 온다”
그가 셀린느 패션쇼에 유니언 워시 플레어 진을 올려놨을 때, 많은 남성들이 바라왔을 것. 나 혼자 유니크함을 즐기려고 하는 게 아니다. 아는 척 좀 하려고 플레어 진을 고수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더 다양한 형태의 부츠컷, 플레어 진을 꿈꿨을 뿐.
이제 국내 컨템포러리 브랜드에서도 플레어 진을 꾸준히 발매 중이다. 도메스틱 브랜드를 자주 둘러보는 에디터는 플레어 진의 시즌 오프 세일 전부터 품절되는 현상도 목격하곤 했다. 기웃거리는 슬림핏 유행에 다리 핏까지 잡아주는 플레어 진이니, 이상한 현상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플레어 진이 예쁜지 물어보는 지인들도 생겨났다. 그래서 준비한 플레어 진 이야기.
부츠컷 핏의 탄생 비화부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브랜드들의 플레어 진 추천까지. 더 맛있게 즐기기 위한 <수학의 정석> 같은 참고서가 되길 바라며.
그래서 플레어가 뭔데?
부츠컷, 플레어, 벨 바텀. 소위 ‘나팔바지’라고 불리는 무릎 아래가 넓은 바지들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플레어(Flare)’가 지칭하는 것은 간단하다.
무릎 아래 넓어지는 부분을 플레어라고 부른다. 그래서 플레어가 제품명에 들어간 바지는 종 모양을 뜻하는 ‘벨 바텀’처럼 하단 부위가 넓은 경향이 있다.
부츠컷 이야기부터 해볼까. 부츠컷은 미국의 골드러시 시절, 리바이스가 작업복으로서 데님을 판매하며 마케팅도 열심히 펼친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작업복에서 패션으로서 청바지를 즐기기 시작할 무렵, 말 그대로 부츠에 착용하면 멋진 핏을 선사해 줄 청바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패션적으로 착용한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패션 부츠’를 위한 제품을 생산한 것은 아니다. ‘레드윙(Redwing)’같은 워크 부츠에 더 멋진 바지 핏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리바이스 517은 플레어 진하면 떠오르는 나팔바지 형태가 훨씬 덜한 편이다. 리바이스 공식 홈페이지 역시 ‘부츠컷’이라는 표현을 확실하게 사용한다.
청바지는 찢어지지 않고, 안전하고, 활동성만 좋으면 그만이었던 작업복에서 부츠에도 잘 어울리고, 다리도 좀 길어 보이고 싶은 ‘멋 좀 부릴 수 있는 바지’가 되었다. 1969년에 출시된 리바이스 517은 501, 505 등의 다른 제품만큼 패션 청바지 역사에서 꽤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물론 랭글러, 리 라이더 등 다양한 부츠컷 팬츠들이 존재하지만 리바이스가 가장 대중적인 브랜드니까. 데님 헌터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해군의 바지에서 차용했던 벨바텀 스타일은 히피 문화와 연결되어 60-70년대 반문화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입었다. 미니스커트로 유명한 영국의 디자이너 ‘마리 퀀트’도 벨바텀 청바지를 디자인했다. 지금은 그 시절 벨바텀만큼 과한 플레어가 들어간 바지를 입는 게 남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나오는 플레어 진들은 이름만큼이나 부츠컷보다는 벨바텀같은 플레어의 넓어지는 형태를 ‘은은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마저도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부츠컷 진, 지금이 마음에 든다면 플레어 진을 선택해보자.
플레어와 관련된 간단한 역사를 알아봤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직접 입어보며 플레어를 즐기는 일뿐. 요즘 스타일로, 섹시한 남자로 만들어 줄 ‘플레어 진’을 살펴보자.
❶ 서커스폴스(Circusfalse), 플레어 진 – 블랙 원 워시 데님
에디 슬리먼으로 글을 시작했으니, 로큰롤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브랜드를 전개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서커스폴스의 플레어 진부터 소개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브랜드일지도. 그러나 구글에 해당 브랜드를 검색하면, 국내 화보에서 심심치 않게 활용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독자들의 ‘나만 아는 예쁜 브랜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걸어 본다.
다리에 딱 달라붙지만, 원 워시에 부드러운 오가닉 코튼을 활용해 다른 빳빳한 슬림 블랙 진보다 편한 착용감을 선사한다. 서커스폴스의 록 무드가 돋보이는 플레어 진 블랙 원 워시 데님. 밑단은 체인 스티치로 마감했지만, 자비 없는 바지 기장은 아마도 수선이 필요할 것이다.
서커스폴스의 ‘플레어 진 – 블랙 원 워시 데님’, 가격은 156,000원.
❷ 유스(Youth), Flared Denim Pants (Men)
두 번째 제품은 유스의 플레어 데님 팬츠. 과하지 않은 세미 플레어 진. 다리에 찰싹 붙는 게 아니라서 불편할 걱정은 덜어주면서도 슬림한 핏을 유지하는 바지다.
데님 원단으로 유명한 일본 쿠로키 사의 오카야마산 오가닉 데님, 왈데스 지퍼 등으로 소재에도 신경을 쓴 모습이 돋보인다. 데님을 오래 입는 사람들이 즐기는 원단과 부자재로 경년 변화도 즐길 수 있다고.
슬림한 분위기를 유지시키면서 조금 더 활동성에 집중하고 싶다면 유스의 플레어 데님 팬츠를 추천한다.
유스의 ‘Flared Denim Pants Washed Black (Men)’, 가격은 203,000원
❸ 타일레(Taille), RON WASH BOOTCUT DENIM PANTS MID BLUE
세미 부츠컷 핏을 자랑하는 타일레의 ‘론 워시 부츠컷 데님 팬츠’. 워싱이 굉장히 매력적인 제품이다. 은은한 고양이 수염 워싱을 만들고, 허벅지엔 음영이 돋보이는 워싱이 눈을 사로잡는다. 시각적으로도 부드러움이 느껴진달까.
이 제품 역시 청바지의 기본을 탄탄하게 지켰다. 오리지널 5포켓 형식에 코아사 실을 활용한 체인 스티치 기법으로 마감했다. 원단은 생로랑, 돌체앤 가바나 등이 사용하는 터키 이스코 사의 프리미엄 데님 원단을 사용했다.
현대적인 감성에 빈티지함까지 모두 가지고 싶다면 타일레 제품을 추천한다.
타일레의 ‘RON WASH BOOTCUT DENIM PANTS MID BLUE’, 가격은 165,000원
❹ 웨이비니스(Waviness), Slope Flare Denim Pants – Indigo Blue
‘플레어 실루엣’의 정석을 보여주는 웨이비니스의 플레어 데님 팬츠다. 플레어 부분이 다른 제품보다 넓다. ‘나팔바지’라고 불렀던 벨바텀 스타일이 돋보이는 바지다.
스티치 색상도 꽤나 특이하다. 노란색이나 검은색을 활용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제품은 빨간색을 활용했다. 생지 원단 위에 은은하게 보이는 빨간색 실. 상대방이 모르고 있다가 발견했을 때, ‘조금 더 특별한 바지’라는 인상을 심어주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요즘 흔하게 못 보는 핏을 활용하면서 이야기도 담을 수 있는, 서로가 기분 좋아질 수 있는 재밌는 바지.
웨이비니스는 ‘2024 한국디자이너패션어워즈’에서 신인디자이너상을 수상한 브랜드라는 점 참고하면 이 브랜드에 조금 더 관심이 가지 않을까.
요즘 대세인 옅은 플레어가 조금 아쉬웠다면 확실한 플레어를 자랑하는 웨이비니스의 제품을 추천한다.
웨이비니스의 ‘Slope Flare Denim Pants – Indigo Blue’, 가격은 169,000원
❺ 에모스탠스클럽(EMOSTANCECLUB), Painted flare fit Carpenter jeans – blue
스트릿 패션 스타일을 즐기는 당신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브랜드 에모스탠스클럽. 플레어 진으로 브랜드를 알린 만큼 해당 ‘페인티드 플레어 핏 카펜터 진’ 역시 꽤나 흥미롭게 보인다.
카펜터 디테일과 작업장에서 일하는 모습이 연상되는 데미지, 페인트 자국이 ‘길거리’ 테마와 잘 어울린다.
발렌시아가의 스트라이크 부츠 같은 부츠를 즐겨 신는다면, 1사이즈 기준 111.5cm나 되는 기장으로 일명 ‘곱창’을 만든다면, 홍대 거리에서 가장 힙한 패션 피플이 되지 않을까.
워커 부츠에 스트릿 감성으로 스타일링할 플레어 핏 데님 팬츠를 찾고 있다면, 에모스탠스클럽의 제품을 추천한다.
에모스탠스클럽의 ‘Painted flare fit Carpenter jeans – blue’, 가격은 249,000원
플레어 진은 스키니 진처럼 몇 년째 “유행이 올 것이다”라는 말만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에디터는 올해는 다를 것이라고 느꼈다. 이유인 즉슨, 작년부터 ‘테일러드 기반’이라는 말이 패션계를 떠돌고 있기 때문. 올드머니, 드뮤어 룩, 미니멀 룩 등도 마찬가지다. 모두 깔끔한 정장이 잘 어울릴 트렌드다.
25SS 및 FW 컬렉션의 중심에 선 클래식한 수트. 수트에 빠질 수 없는 부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바지 핏이 플레어 핏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부츠에는 부츠컷과 플레어 진을 입어보자고. 새로운 매력에 빠지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