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와 지위를 뽐내야 하는 아주 특별한 자리에 가야 할 때, 분수에 맞지 않게 샀던 비싼 옷을 꺼내 입게 된다. 그런 자리가 얼마나 자주 있을까. 당연히 아주 가끔. 평소에 입고 다니기엔 몸보다 소중한 내 옷이 상할까 봐 고이 옷장 속에 모셔둔다.
수백, 수천까지도 가는 역사에 남을 옷들을 수집하는 미국의 패션 컬렉터이자 스타일리스트, ‘데이비드 카사반트(David Casavant)’. 그는 말했다.
“옷이란 실제로 누군가가 입기 전까지는 살아 숨 쉰다고 할 수 없다.”
-데이비드 카사반트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쇼핑만 해
1990년대 생인 그가 살던 시대에 남성 패션 씬은 라프 시몬스나 에디 슬리먼 등이 하이패션에 서브컬처가 결합시키면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어린 나이에 패션에 눈을 뜬 데이비드 카사반트는 14살 때부터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이베이를 탐험하며 아카이브 피스들을 모았다. 그중에도 그가 집착한 브랜드는 라프 시몬스와 헬무트 랭. 데이비드 카사반트는 매장에서 새 옷을 사기에는 돈이 부족해 이베이를 애용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라프 시몬스 옷들은 에디 슬리먼 같은 유명 디자이너들의 옷보다 훨씬 저렴했다고.
그는 보는 눈이 있었다. 그냥 비싸고 예쁜 옷보다는 문화에 기반을 둔 의미 있는 옷들을 모았고, 이는 지금의 ‘데이비드 카사반트’를 만들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가진 아카이브 가치는 더욱더 높아지고, 인정받고 있다.
패스트패션이 내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자라, H&M 등 패스트패션 브랜드의 등장은 계절마다 새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데이비드 카사반트는 이를 보며, 자신이 모은 제품들의 소장 가치 뼈저리게 느끼고, 본격적인 아카이빙을 시작했다.
그의 열정은 결국 어마어마한 돈이 되는 사업으로 이어졌다.
못 구했다고? 빌려줄게
그는 정성스레 관리하기도 바쁜 보물들을 필요한 이들에게 빌려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옷이 가진 희소성보다 수요가 더 높았으니. 옷은 입어야 옷이라는 그의 철학에도 맞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해외 유명 잡지들의 화보는 물론, 칸예 웨스트나 트래비스 스캇 등의 패션 아이콘 아티스트들도 데이비드 카사반트를 수시로 찾는다. 심지어 티모시 살라메도 그를 찾을 정도라고.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옷이 아니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데이비드 카사반트에 따르면, 지금까지 약 1,000개 정도 되는 빈티지 라프 시몬스와 헬무트 랭을 모았다고 한다.
패션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그의 박물관을 보고 반하지 않을 수 없을 터. 칸예 웨스트의 스타일리스트는 데이비드 카사반트의 렌탈 서비스를 가장 애용하는 단골 중 한 명이다.
칸예 웨스트가 입었던 카모 봄버 자켓, 라프 시몬스 후드 티 등 유명한 라프 시몬스 아카이브들은 대부분 그의 의류 렌탈 서비스를 통해 착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칸예, 빌려 갔으면 갚아야지
2022년, 옷 하나로 가까워진 칸예 웨스트와 데이비드 카사반트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다. 수 십장의 옷을 빌려놓고 렌탈비를 치르지 않은 것.
2020년 10월에 총 20만 달러에 달하는 아이템을 빌린 채 2년이나 갚지 않자, 데이비드 카사반트는 결국 칸예를 소송하게 되었다.
소장 가치가 높은 빈티지 의류를 다른 옷으로 대체하는 행위는 컬렉터 입장에서 있을 수 없는 일. 그는 칸예 웨스트에게 13개의 아카이브 제품에 대한 미납 렌탈비 약 22만 달러에 제품 교체 비용 약 19만5천 달러를 지불하라고 했다.
데이비드 카사반트가 요즘 빠진 브랜드는?
최근 그는 크레이그 그린과 웨일스 보너를 수집 중이라고 한다. 건축물처럼 구조적인 크레이그 그린은 해체주의의 미학과 다채로운 소재들로 주목을 받고 있다.
웨일스 보너는 아디다스와의 콜라보로 대중들에게도 유명한 디자이너이자 브랜드다. 정교한 테일러링에 중남미의 따스한 분위기를 옷으로 표현한다.
데이비드 카사반트의 눈에 들어온 두 디자이너가 넥스트 라프 시몬스가 될 수 있을지 주목해 볼 만하다.
‘패션’으로 소비되는 패션
‘Fashion’을 직역하면 최신 유행이라는 뜻이다. 옷이 패션이라는 단어로 완전히 대체되면서 유행에 휘둘리는 현상은 지속되고 있다.
그 사이에 데이비드 카사반트와 같은 컬렉터들은 매번 새로운 옷을 사며 소비를 위한 소비를 하기 보다 오래된 옷이 주는 이야기와 가치들을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