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부터 청담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부촌에 위치한 도로인 도산대로. 독립운동가 안창호(1878.11.09~1938.03.10) 선생의 호, ‘도산’에서 따온 도로명이다.
도산대로에는 안창호 선생의 묘소가 있는 ‘도산공원’이 있다. 그의 정신을 배우고 뜻을 기리는 곳이자, 그의 희생 덕분에 독립을 맞은 우리들의 ‘쉼터’로 관리되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섬, 하와이를 보며 조국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결심을 다졌고, ‘도산’이라는 호를 지었다.
그는 일생을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1897년, 만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독립협회에 가입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뛰어난 연설로 민중에게 자주독립의 의지를 심어줬다. 그는 이때부터 ‘청년 연설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라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이요,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라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이다.”
훗날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 되는 ‘이승훈’은 만민공동회에서 있었던 앳된 청년 안창호의 연설을 두고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낙망(희망을 잃는 것)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정부와의 갈등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안창호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가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1902년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이후 국내와 해외를 오가며 수없이 많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독립을 위해서는 신분과 재산, 계층을 가리지 않고 국민 모두가 무지에서 벗어나 깨우쳐야 한다는 ‘애국계몽’을 끊임없이 역설했다.
또한 ‘교육을 통해 국권을 회복한다’는 ‘교육구국’의 신념 아래 그의 생에 중 여러 시기, 국내외에 점진학교, 대성학교, 동명학원과 같은 교육기관들을 설립/운영하며 침체된 국운 속에서도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흔히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회란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이러한 안창호 선생의 헌신은 특권층 주도의 독립운동이 아닌, 국민 전체의 독립운동 참여에 영향을 미쳤다.
1907년, 그를 중심으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는 교육과 언론을 통한 실력양성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공장을 만들어 자금을 모으는 등 산업과 노동을 통해 독립을 위한 재정 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의병운동 지원을 통한 무장 투쟁의 초석을 다졌다.
“내가 며칠 후에는 피 흘리는 이에게 절하겠소만은, 오늘은 돈 바치는 이에게 절하겠소.”
신민회는 1911년, 조선총독부가 독립운동 탄압 목적으로 ‘독립 자금 모금활동’을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모의’로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인해 회원 대다수가 체포/투옥되며 해산됐다.
이 사건 이후 일제의 탄압이 점점 거세지자, 안창호 선생은 감시를 피해 미국으로 출국, 포기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특히,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을 재건하여 3·1운동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그중 흥사단은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는 서울 종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돕는 사업과 민주 사회를 위한 활동 및 다양한 교육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 후 내무총장을 시작으로 여러 요직을 거치며 활동을 계속 이어갔고, 1930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당인 ‘한국 독립당’을 결성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져 다수의 일본군 요인 사상자를 낸 것으로 유명한 ‘훙커우공원 의거’의 여파로 체포된 안창호 선생은 국내로 압송됐고,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 형무소에서 차례로 복역했다.
복역 중 건강 악화로 보석을 신청, 동료들이 보석금을 지불하여 가석방된 그는 출소 이후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으로도 강연과 교육을 이어갔다. 하지만 흥사단의 국내 조직격인 ‘수양동우회’를 통해 민족운동을 지도하다 1937년 6월, 또다시 체포됐고, 서대문 형무소에 다시 수감, 모진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1937년 12월, 또다시 병세가 악화되며 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졌고, 출소 후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지속된 고문과 옥고를 통한 건강 악화로 회복하지 못했다. 1938년 3월 10일, 도산 안창호 선생은 끝내 조국 독립을 직접 보지 못한 채 5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진실은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그가 떠난 뒤, 7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조국은 염원하던 광복을 맞이했다. 그의 존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조국 독립에 수많은 이들을 뛰어들게 만들었다.
위대한 신념을 가진 인간에게 불가능은 그저 무의미한 단어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본인의 삶으로 증명한 도산 안창호 선생. 그가 품었던 대의는 이제, 대로가 되어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나라를 위해 스러져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기리는 현충일. 오늘만큼은 도산대로 위를 달리는 값비싼 차들 대신, 도산공원 곳곳에 위치한 값을 매길 수 없는 도산의 말씀을 눈에 담아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