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12월 24일, 잠실 체조경기장에 무한궤도의 ‘그대에게’가 울려 퍼졌다. 마지막 순서였던 참가번호 16번. 신디사이저 네 대가 만들어낸 전주가 시작됐고, 모두가 떠올렸다.
‘아, 한국 음악사의 새로운 별이 탄생하는구나.’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학생들 다섯 명이 모여 결성된 밴드, 무한궤도. 당연스럽게도 MBC 대학가요제 대상은 이들의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1집을 준비하던 중 정석원이 키보디스트로 합류했다. 정석원은 당시 ‘실험실’이라는 밴드로 강변가요제에 참여했다. 실험실은 1차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무한궤도의 보컬 신해철이 그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6인조로 구성된 무한궤도는 마침내 정규 1집,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를 발매했다.
하지만 각자의 의견 차이와 학업에 집중하겠다는 멤버가 있어 결국 무한궤도는 미완성으로 끝이 났다. 1집 앨범 발매 직후 무한궤도는 해체의 수순을 밟았다.
이후 신해철은 음악의 길을 걷기 위해 솔로로 데뷔했다. 그리고 무한궤도의 키보디스트 정석원이 그의 형 장호일(본명 정기원), 그리고 무한궤도의 베이시스트 조형곤과 함께 밴드 015B를 결성했다. 015B의 의미가 0(무), 1(한), 5B(Orbit, 궤도)라는 설이 있지만, 이에 대해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런데 보컬이 없었다. 금방 해체될 것이라는 생각에 메인 보컬 없이 앨범을 만들기 시작한 것. 멤버들은 1집 때까지만 해도 곧 현업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최초로 객원 보컬 시스템을 도입했다. 보컬이 없는 대신, 프로듀싱 중심으로 음악을 만들어나갔다.

“015B와 함께 좋은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다면 누구나 지원 가능합니다.”
그렇게 윤종신과 신해철, 이장우, 유희열, 김돈규, 김태우, 버벌진트 등 수십 명의 가수들이 015B와 함께 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가 이들의 앨범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보컬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음악 스타일에 맞게 보컬을 찾아 함께 하고 있다.

“가수의 목소리도 하나의 악기로 받아들이자는 생각이다. 우리가 만드는 음악의 종류에 따라 가수를 세션 맨처럼 동원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015B의 음악은 트렌디하고, 다양하다. 과거 한국음악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하우스 장르부터 록은 물론 뉴 잭 스윙, 힙합까지. 이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미국의 팝 음악 트렌드를 캐치해 진보적인 음악을 시도했다.
지금 015B는 2018년부터 거의 매달 신곡을 발표하고 있다. 윤종신이 옆 작업실에서 [월간 윤종신]을 작업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자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뮤지션은 음악을 계속해야 한다. 다른 것을 떠나서 자아실현이다. 안 하면 불행하다.”

텅 빈 거리에서(1990)
이들의 1집 앨범 [공일오비]는 1대 객원 보컬 윤종신과 신해철, 최기식이 함께 했다. ‘텅 빈 거리에서’는 015B의 데뷔곡이자 윤종신의 데뷔곡이었다. 처음 보컬을 영입할 때 장호일은 밴드의 얼굴은 보컬이라며 결사반대했다고. 그러나 나머지 멤버들이 노래를 잘하니 괜찮다며 설득했고, 결국 윤종신이 ‘텅 빈 거리에서’를 비롯해 세 곡을 함께 했다. 그리고 윤종신과 함께 한 ‘텅 빈 거리에서’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며 015B와 윤종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젠 안녕(1991)
015B 멤버들이 해체를 생각하며 만든 곡, 이젠 안녕. 무한궤도 해체 후 잔류한 멤버들끼리 만든 1집 [공일오비]는 사실 밴드의 마무리를 기념하는 앨범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반응이 좋았고, 회사에서는 마음을 바꿔 2집을 내자고 했다.
그렇게 작은방에 모인 멤버들은 피아노 하나만을 연주하며 파트를 나눠 불렀다. 015B 멤버인 정석원, 장호일, 조형곤, 그리고 015B 1집 발매 전 탈퇴했던 무한궤도 드러머 조현찬까지. 거기에 윤종신과 신해철 등 그들과 함께 했던 객원 보컬들이 모두 모여 한 소절씩 부른 것이 ‘이젠 안녕’이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그렇다. 안녕을 외친 이들은 또 성공을 거둬 끝을 볼 수 없었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1992)
90년대, 미국에서는 뉴 잭 스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중 떠오르던 장르는 하우스였고, 정석원이 이를 빠르게 캐치해냈다. 물론 한국 가요계에 하우스는 낯선 장르였고, 트렌디한 음악으로 들려왔다. 무려 1분 20초 동안 전주만이 흘러나오는 이 곡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100만 장 이상의 앨범이 팔렸다. 그렇게 015B의 음악은 2025년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