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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자신의 나팔을 불어라

뉴욕의 거리 화가 장 미쉘 바스키아 (Jean Michael Basqui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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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카소’라는 닉네임의 20세기 천재 화가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ael Basquiat)’. 그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올해로 65세가 됐을 것, 하지만 그는 27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뉴욕-화가-장미쉘바스키아-다운타운81

가족의 영향은 그 어떠한 것보다 크다

그는 예술가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회계사로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머니는 패션 디자이너로 그의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가족은 여러 의미로 그의 삶을 뒤바꿔 놓았다. 가장 큰 사건은 ‘이혼’이었다. 의견이 맞지 않아 이혼을 선택한 바스키아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는 당시의 충격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방황했다. 하지만 이 방황이 그의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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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하지 못한 집안 환경 때문에 그는 당시로서는 슬럼가였던 뉴욕 브루클린의 파크 슬로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동네는 흑인이 많았고, 힙합 문화가 활성화되어 동네 건물 외벽에는 그라피티 작업들이 가득했다. 방황하던 어린 검은 피카소, 그는 수많은 그라피티 작업들 중에서도 특히 10대들의 어리숙한 그라피티를 주목했다. 어린이들의 그라피티 작업물은 분명 부족했지만, 오히려 그는 원색적이고 창의적인 작업들에 매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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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O is DEAD’

학교를 자퇴한 그는 영재들을 위해 설립된 대안학교 ‘City as School’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미술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때 그의 옆에는 또 다른 낙서 화가 ‘알 디아즈(Al Diaz)’가 있었다. 

바스키아와 알 디아즈는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같았고, 함께 크루를 만들었다. 크루의 이름은 ‘쌔이모(SAMO)’, 흔해빠진 것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담긴 공격적인 의견을 담은 그라피티 크루였다. 

뉴욕-화가-장미쉘바스키아-다운타운81

뉴욕 소호 거리를 배회하며 그라피티 작업을 이어가던 쌔이모, 의견 일치로 시작된 크루지만, 결국 견해 차이는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비슷한 길을 가는 두 작가라도, 서로 다른 점은 있었기 때문. 바스키아는 유명한 ‘스타 아티스트’의 길을 가고 싶었고, 디아즈는 얼굴 없는 아티스트, 익명의 아티스트로 작업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로 인해 결국 둘은 ‘이별’을 선택했다. 

당시 독특한 스타일의 작업으로 크루는 조금씩 인기를 얻어 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크루의 갑작스러운 해체가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바스키아와 디아즈는 이별할 때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팬들에게 알렸다. 그라피티 작업으로 벽에 ‘사모는 죽었다(SAMO is DEAD)’를 적은 것. 둘의 천재성이 다시 한번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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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디아즈와 이별한 바스키아, 그에게 다시 한번 거대한 기회가 찾아왔으니. 20세기를 대표하는 스타 아티스트 ‘앤디 워홀(Andy Warhol)’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 유명세를 원했던 바스키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식당에 들어가던 앤디 워홀을 보고 그대로 돌진, 자신의 작업물을 들이밀었다. 평소에도 이런 일이 흔했을 앤디 워홀, 하지만 바스키아의 그림이 그려진 작은 쪽지에서 그는 거대한 가능성을 발견했다. 

뉴욕-화가-장미쉘바스키아-다운타운81

그리고 바스키아에게 그림을 달라고 부탁하는데, 바스키아는 그냥 줄 수는 없고, 구매하라고 말한다. 이에 앤디 워홀은 무명에 가까웠던 바스키아의 작품을 돈을 주고 구매했다. 그만큼 바스키아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던 것. 그리고 이 부분에서 바스키아의 자신감과 작품을 대하는 태도, 가치관을 모두 엿볼 수 있다. 

만남 이후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의 지원을 받아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유롭게 앤디 워홀의 팩토리를 활용했고, 앤디 워홀은 막대한 재정적 지원과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했다. 결국 바스키아는 본인의 목표였던 ‘스타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은 생각보다 빠르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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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망친 유명세

하지만 어린 나이의 큰 유명세는 ‘독’이 되는 법. 그 역시 그토록 꿈꾸던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 유명세 때문에 극심한 심적 부담감과 외로움, 슬픔에 빠지게 됐다. 또 근거 없는 소문이 그를 옥죄었는데, ‘바스키아가 앤디 워홀과 동성연애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뉴욕을 감쌌기 때문. 이처럼 유명세는 바스키아에게 ‘저주’와 같았다. 

뉴욕-화가-장미쉘바스키아-다운타운81

1987년 2월 21일, 바스키아의 불안했던 심리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거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의 멘토이자 스승, 동료이자 친구였던 앤디 워홀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웠고, 이 사실을 전달받은 바스키아는 무너졌다. 

뉴욕-화가-장미쉘바스키아-다운타운81

길을 잃어버린 바스키아는 헤로인에 중독됐다. 그리고 마약은 언제나 그렇듯, 정신과 신체를 갉아먹었고, 결국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5개월 만인 1988년 8월 12일, ‘가장 유명한 화가’라는 타이틀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27살이었다.

뉴욕-화가-장미쉘바스키아-다운타운81

<다운타운81>

영화 <다운타운81>은 바스키아가 불과 19살이었던 1980년부터 1981년 1월까지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 바스키아는 노숙자였다. 자퇴로 집에서 쫓겨난 상태였기 때문. 뉴욕을 방황하는 어린 예술가인 상태였다. 

영화는 바스키아의 실제 삶을 조명하기 때문에 굉장히 사실적이다. 물론 집도 돈도 없던 바스키아에게 임시로 거주할 수 있도록 제작사 사무실을 제공하고,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장비를 제공하는 등 원활한 영화 제작을 위한 발판은 깔아줬지만 최대한 날 것의 바스키아를 담기 위해 노력했다. 

뉴욕-화가-장미쉘바스키아-다운타운81

영화 속 바스키아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뉴욕의 가능성과 가슴에 품은 꿈을 마음껏 펼치는 모습이다. 영감으로 가득 찬 도시를 배회하며 그라피티 작업을 이어나간다.에도 베르톨리오 감독에 의해 완성된 <다운타운81>은 성공적으로 촬영이 끝났지만, 재정 문제로 인해 80년대 중반에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제작이 중단됐다. 

하지만 그 후로 바스키아는 유명한 화가로 거듭났고, 안타까운 죽음으로 거리의 신화가 됐다. 결국 바스키아의 사망 후 10년이 지난 1999년에 영화는 다시 제작이 진행됐고, 2000년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작품은 호평받았다. 바스키아의 무명 시절의 삶을 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리얼리티 한 뉴욕 예술가의 삶을 보여주는 아티스틱 한 영상미를 선사했다. 

1980년대 뉴욕 맨해튼의 남동쪽 지역과 역사적인 예술가의 무명 시절을 엿보고 싶다면 <다운타운81>을 꼭 한번 관람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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