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장례식에서 틀 노래를 미리 정한다면 당신은 어떤 음악을 고를 것인가. 일본 영화 음악의 거장 류이치 사카모토는 자신의 장례식에서 재생되기를 바랐던 33개의 곡을 ‘funeral’이라는 제목의 플레이리스트에 수록했다. 그중에는 생전 고인이 좋아했던 빌 에반스의 ‘Time Remembered’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Time Remembered’도 좋지만, 필자는 빌 에반스의 ‘You Must Believe In Spring’을 장례식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싶다. 아무리 추운 겨울일지라도 결국에는 끝이 나고 봄이 찾아오기에, 필자의 장례식에 오는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믿으면서 남은 생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서론이 길었는데, 장례식에 찾아와 준 이들에게 빌 에반스의 음악을 마지막 인사로 건네고 싶을 정도로 그의 음악이 좋다는 얘기였다. 빌 에반스는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다.
그의 음악은 우리가 봄을 믿을 수 있게 해주었지만 정작 그는 그러지 못했다. 5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빌 에반스의 죽음을 두고 그의 친구는 역사상 가장 긴 자살이라고 표현했다. 거기에는 긴 이야기가 얽혀있다.
한 번의 사고, 두 번의 자살
첫 번째는 절친한 동료의 죽음이었다. 1961년, 빌 에반스 트리오는 라이브하우스 빌리지 뱅가드에서 라이브 음원을 녹음했다. 이때 연주했던 곡 중에는 그의 최고 히트곡 ‘Waltz For Debby’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열흘 뒤, 트리오의 멤버였던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를 잃은 슬픔에 빌 에반스는 몇 달간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약물에 빠져 살게 된다.
여담이지만 ‘Waltz For Debby’는 빌 에반스의 친형 해리 에반스의 딸 데비를 위한 곡으로, 데비가 해변에서 아장아장 걷는 것을 보고 만들었다. 그가 그의 조카를 얼마나 어여삐 여겼는지 ‘Waltz For Debby’를 들어보면 느낄 수 있다.
두 번째는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이었다. 빌 에반스에게는 10년 이상을 함께한 연인 엘레인이 있었다.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부부 같은 관계였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는데, 빌 에반스는 아이를 가지고 싶어했지만 엘레인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이 변심의 원인이었는지 빌 에반스는 다른 여자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엘레인에게 알린다.
그런데 그녀는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 이해한다고 말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이별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던 그녀는 사실 그렇지 못했고, 달려오는 뉴욕 지하철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1973년의 일이었다.
엘레인을 잃은 슬픔을 하루빨리 잊기 위함이었을까. 엘레인이 세상을 떠난 그 해, 빌 에반스는 새 연인과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가진다. 그렇지만 이후 ‘Hi Lili, Hi Lo (For Elaine)’라는 곡으로 엘레인을 위한 연주를 한다.
세 번째는 둘도 없는 동반자였던 친형의 죽음이었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자라온 형제는 함께 재즈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다. 형제가 출연한 다큐멘터리 <Universal Mind of Bill Evans>(1966)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음악적으로도 훌륭한 동료 관계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1979년, 정신분열증과 우울증을 앓던 그의 형 해리 에반스가 권총으로 자살한다. 사랑하는 동료, 연인, 그리고 가족을 연달아 잃고도 제정신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스스로 간염약을 끊고 마약에만 의존하며 완전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걸음씩
그리고 형이 떠난 지 1년 뒤인 1980년, 그는 만성 간염과 약물 중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빌 에반스의 죽음을 두고 그의 친구는 ‘역사상 가장 긴 자살’이라고 표현했다는데, 이제는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마지막 작업물들을 엮은 음반 [You Must Believe In Spring]이 발매된다. 첫 번째 트랙 ‘B Minor Waltz (For Ellaine)’, 네 번째 트랙 ‘We Will Meet Again (For Harry)’은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각각 엘레인과 해리 에반스에게 바치는 곡이다.
그리고 이 앨범의 두 번째 트랙은 앨범의 제목과 같은 ‘You Must Believe In Spring’이라는 곡으로, ‘당신은 봄을 믿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정작 그는 그러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당신은 봄을 믿어야만 한다
1976년 빌 에반스가 토니 베넷과 발표한 두 번째 듀엣 앨범 [Together Again]에 수록된 ‘You Must Believe In Spring’에는 가사가 있다.
“When lonely feelings chill
The meadows of your mind
Just think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당신의 마음속 초원에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 느껴질 때, 겨울이 왔다는 것은 봄도 멀지 않았음을 떠올리세요.
당신의 인생에 겨울이 찾아왔다면, 곧 봄도 찾아올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은 봄을 믿으며 살아가야 한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