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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제 손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 류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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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요소가 유기적으로 얽혀 탄생하는 예술, 영화. 그리고 백여 명의 스태프들과 배우가 만들어낸 영화 속 세계에 당신이 들어가면, 비로소 영화가 완성된다.

화면 속 인물과 공간, 소품, 의상 등 모든 비주얼과 룩은 영화의 분위기와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소로써 작용한다. 이들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몰입이 깨져 영화 밖으로 이탈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적인 요소는 모두 미술감독,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손에서 탄생한다.

‘프로덕션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빅터 플레밍 감독의 1939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당시 미술을 담당했던 ‘윌리엄 카메론 멘지스’가 영화 속 모든 시각적인 부분을 담당해 완성도를 높였고, 이를 인정받아 제1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명예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영화 미술을 일컫는 프로덕션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물론,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역할은 단순히 멋지기만 한 공간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의 삶과 그의 세밀한 내면까지 반영해, 시각적 의미를 더하는 것이 미술팀의 역할이다.

공간에는 머무르는 이의 생활 습관이, 소품에는 이들의 심리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렇기에 주인공 방에 놓인 작은 액자 하나에도 의미가 담겨있기 마련이다.

촬영 전 ‘프리 프로덕션(Pre-Production)’ 단계에서 미술팀은 시나리오를 분석한 뒤, 이를 바탕으로 공간을 설계하고 인물의 성격과 그 서사에 맞는 소품, 의상 등을 준비한다. 텍스트로만 존재하던 것들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는 것이 바로 이들의 예술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계에서는 연출팀이 미술을 함께 맡아 진행했다. 그리고 1992년, 이현승 감독의 <그대 안의 블루>에서 안상수 시각디자인학과 교수가 아트 디렉터로 참여하며 프로덕션 디자인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작업이 미학적으로 인정받아, 한국 영화 제작 시스템에서도 프로덕션 디자인이 점차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 한국 영화계의 미술을 바꾸어놓은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류성희 미술감독이다. 그는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최동훈 등 한국 영화계 거장들의 상상을 현실로 구현해왔다.

그의 첫 상업 장르 영화는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였다. 이후 류승완 감독의 소개로 봉준호, 박찬욱 감독 등 내로라하는 한국 감독들과의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류성희 미술감독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 중 하나인 벽지.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속 서래 집의 벽지를 먼저 살펴보자.

산인 듯 바다인 듯, 초록인 듯 파랑인 듯. 모호한 서래의 마음이 벽지와 의상에도 담겨있다. 반면 해준과 정안이 거주하는 이포의 집은 밝고 깨끗한, 그래서 단조로운 느낌을 줘 오히려 갑갑한 느낌이 든다.

이곳의 경찰서는 일반적인 경찰서의 느낌과는 달리 디자인되었다. 박찬욱 감독은 서래와 해준이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장소가 경찰서이기 때문에, 기존의 경찰서와는 다른 느낌을 원했다. 그렇게 류성희 감독의 손에서 해준과 서래의 미묘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후 해준은 경북 이포경찰서로 전근한다. 가상의 지역인 이포는 안개가 자욱해 습한 도시다. 그래서 이포의 경찰서에는 곰팡이가 슬어있도록 세트를 제작했다고.

해준과 서래가 사용하는 음성 메모 앱 또한 미술팀에서 제작한 것이다. 노을이 지는 과정을 시각적인 움직임으로 구현한 것. 서로의 목소리를 녹음해 들을 때 사용될 예정이었지만, 아쉽게도 분량 문제로 영화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박찬욱 감독과 류성희 미술감독은 서로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을 함께 했다. 박찬욱 감독은 그가 한국 영화계의 미술을 바꿔놓았다고 언급하기도. 그리고 2016년, 제69회 칸영화제에서 류성희 미술감독은 <아가씨>로 벌칸상(기술상)을 수상했다. 이는 미술감독이 최초로 벌킨상 단독 수상을 한 것이었다.

“할리우드와 비교한다면 아직은 우리의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여정에 있지만, 산업이 건강하게 지속된다면 더 깊고 놀라운 세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 류성희 미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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