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미국에서 3일 동안 진행됐던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Music and Art Fair)’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었다. 60년대 미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이 뒤섞여 탄생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60년대 미국의 분위기와 상황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역사 이야기는 지루하다. 짧고 굵게, 핵심만 골라서 정리하고 빠르게 넘어가자.
‘I Have a Dream’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흑인들은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다. 흑인과 백인 아이들은 학교를 따로 다녔고, 타는 버스조차 분리되어 있었다.
흑인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대규모 행진과 시위, 항쟁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들의 피와 땀이 녹아있는 노력은 결국 큰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명의 자녀들이 이 나라에 살면서 피부색으로 평가받지 않고, 인격으로 평가받게 되는 날이 오는 꿈입니다’ 1963년 워싱턴 대행진에서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연설을 펼쳤다.
계속되는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 덕분에 1964년에 시민권 법이 제정됐고, 1965년에는 투표권 법까지 제정되면서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법적으로 금지됐다. 전쟁을 멈추자
60년대 초반,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북베트남이 미국의 구축함을 어뢰로 공격한 ‘통킹만 사건’이 발단이었다. 미국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1백만 톤이 넘는 대량의 폭탄을 쏟아부었고, 약 55만 명에 이르는 지상군을 베트남으로 파병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 큰 상처를 남겼다. 베트남으로 파병을 떠난 수많은 미국의 아들들이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전쟁을 멈추자는 크고 작은 평화운동이 지속됐다. 여성에 대한 차별을 멈춰라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과 베트남 전쟁만으로도 충분히 어지러웠던 60년대 미국, 여기에 더해서 ‘우먼 리브(Women’s Liberation)’ 운동까지 펼쳐졌다. 당시에는 성차별도 만연했다. 여성들은 전문적인 일을 거의 하지 못했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완벽하게 보장받지 못했다. 이에 여성의 권리 확장과 사회적 위치 혁신을 위한 여성해방운동이 잦았다. 복잡한 세상은 새로운 문화를 만든다
사회가 혼란스러우면 새로운 문화가 발생한다. 평화와 사랑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히피(Hippie)’ 문화는 당시의 시대상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히피족은 자유를 상징한다. 차별과 갈등, 자유의 억압에 지친 히피족은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에 반대되는 길게 풀어헤친 머리와 컬러풀한 의상, 크고 화려한 장신구를 입었고, 소비주의를 비판하며 자연과 생활했다. 하지만 그들은 영감과 영적 탐구, 정신적 해방을 위한다는 이유로 마약을 사했고, 집단 난교를 하는 등 도를 넘어선 행동도 많이 보여줬다. 이로 인해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미 히피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고, 반전사상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 집단으로 활동하며 소극적인 활동을 했기에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크게 주목받는 존재들은 아니었다.
3 Days of Peace & Music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히피 문화가 정점을 찍었던 1969년 8월 15일에 개최됐다. 사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개최되지 못하고 무산될 위기에 처했었다. 몇 만 명에 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마약과 섹스를 하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었던 뉴욕주 월킬 시의회가 공연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 그렇게 위기에 처한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구해낸 건 ‘앨리 벗 타이버’였다. 맨해튼에서 게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근무하며 주말이면 베델에서 이성애자 사업가로 이중의 삶을 살아가던 ‘ 그. 그는 위기에 빠진 주최 팀에 먼저 연락해 뉴욕 주의 베델 지역을 공연 장소로 추천했다.
그렇게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엘리엇 타이버의 절친이었던 맥스 야스거의 농장에서 겨우겨우 개최될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히피들이여, 이곳으로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그동안 흩어져서 소극적으로 살아가던 히피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몇 명이 모였냐고? 정확히 몇 명이 모였는지는 계산할 수 없다. 입장 표? 입구? 몰려드는 사람들이 전부 부쉈다. 어림짐작으로 약 3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였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페스티벌 현장의 환경은 처참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뒤엉켰고, 비가 내려서 농장의 바닥은 ‘흙뻘’로 변했다. 화장실? 당연히 부족했고 음식과 물도 부족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렇게 대 환장 파티가 되어버린 우드스탁 페스티벌, 하지만 히피들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온몸으로 즐겼다. 볼일은 대충 숲속에서 해결했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샤워를 대신했다.
그 누구도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국가도, 뉴욕시도, 돈을 노리는 마피아도 히피들의 흥분과 광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평화
하지만 그럼에도 1969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는 분명 ‘사랑과 평화’가 있었다. 출신, 나이, 종교, 피부색, 정치 성향 등 모든 편견과 차별을 초월한 히피들은 다양한 문제와 사건에도 불구하고 서로 모여서 명상을 하거나 토론을 하는 등 서로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공유했다. 대미를 장식한 지미 핸드릭스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는 다양한 장르의 록 뮤지션이 참여했다. 모두가 큰 임팩트를 남겼지만, 지미 핸드릭스의 공연은 방점을 찍었다.
그는 미국 기타로 미국 국가를 연주했는데, 이펙터로 폭탄과 비명 소리 등을 넣으며 전쟁으로 고통받는 미국의 현실을 풍자적으로 표현했다. 테이킹 우드스탁
무너진 입구, 사라진 질서, 뮤지션들의 높은 개런티로 페스티벌은 130만 달러의 손실을 봤다. 하지만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현장 사운드를 담은 사운드트랙과 비디오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고, 손실을 뛰어넘는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페스티벌의 모습과 당시 미국의 사회상을 담은 영화 <테이킹 우드스탁>도 개봉했는데,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과거의 특수한 분위기를 담아내며 호평받았다. 이처럼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분명한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단순한 음악 이벤트를 넘어서 평화와 사랑의 향연으로 남아있다. 지저분 한 흙 밭 위에서 솟아나는 음악과 인간의 연대, 그 순간의 마법은 불안한 시대를 지핀 희망의 불씨로 기록되며, 세대를 넘어 여전히 그날의 에너지와 상징성은 울려 퍼지고 있다.
어쩌면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의 환희와 자유로움의 곡조를 간직한 채 영원히 인간의 자유를 노래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