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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일제의 흔적을 청산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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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디오리진-모던보이-일제시대-일제강점기-한국영화-이순신-충무공-충무로지명유래

서울의 중심에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다. ‘충무로’. 조선의 최고 명장이자 구국 영웅인 그의 시호는 어쩌다 이곳에 붙었을까.

한국인이라면 충무로를 떠올릴 때 당연 이순신 장군을 떠올릴 것. 재미있는 점이 있다면 조선시대에 ‘충무’라는 시호를 가진 사람은 이순신 장군 한 명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충무로의 충무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도로명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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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생가터는 명보아트홀 앞과 인현동1가 31-2번지(신도빌딩), 두 군데가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신도빌딩이 지어진 곳이 진짜 생가터라고. 두 개의 생가터가 위치한 곳의 도로명은 또 을지로라는 해프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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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터는 근처에 있지만, 단순한 이유만으로 지명에 이순신 장군의 시호가 붙은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힌트가 있다.

일본인들이 자리 잡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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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는 중구에 있다. 경복궁이 아닌 도성의 동쪽인 동대문 쪽에 중구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뭘까.

구한말,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혼마치(本町)’라고 불렸다. ‘거주지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일본인들이 조선에 넘어왔던 초기에 자리 잡은 곳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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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오기 전까지 조선의 전통적인 중심지는 경복궁이 위치한 곳, 종로였다. 그러나 일본 상인들이 넘쳐났던 이곳은 곧장 활발한 상업중심지가 되었다. 돈 좀 있다 싶거나 새로운 문명의 맛을 알아버린 젊은이들은 백화점, 레스토랑들이 즐비한 혼마치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모던 보이’, ‘모던 걸’로 불리며 대표되는 인물로는 시대의 작가 ‘이상’이 있다.

그래서 혼마치는 박경리 작가의 소설 <토지>, 박윤석 작가의 <경성 모던 타임스> 등 당대를 이야기하는 많은 소설 속에 나타난다. 명동과 함께 조선 최고의 상업지였기에, 모던 걸, 모던 보이들이 주로 드나들던 곳이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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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동경의 긴자 거리를 헤매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의 군상을 일컬어 ‘긴부라’라 한 것처럼 경성의 혼마치 주변을 맴도는 이들을 ‘혼부라’로 빗대어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 <경성 모던 타임스>, 박윤석

해방된 이후에도 이미 커져버린 거리 상권으로 인해 ‘중심’구가 된 충무로 지역이 ‘중구’라는 이름을 가졌다.

일본인들의 거주지라는 잔재가 남아있는 이곳에 배 13척으로 왜군을 전멸시켰던 이순신 장군의 시호 ‘충무’를 도로명에 붙이며 일제강점기를 청산하고자 했다.

여기가 바로 한국의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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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엔 할리우드, 인도는 볼리우드. 각 나라별로 유독 영화 산업이 발전하는 곳이 있다. 한국에도 있다. 영화계에 발을 디딘 사람들에게 ‘충무로에 입성했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충무로는 한국 영화산업의 상징이자 고유명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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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6.25전쟁이 끝나고 영화인들이 본래 최대 상업지였던 명동에서 충무로 3가 쪽으로 거처를 옮겨갔다. 막 전쟁이 끝났는데, 영화 제작시설이 갖춰져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는 군 촬영소가 남아 있었다. 이를 이용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던 것.

필동 촬영소를 중심으로 영화사, 관련 회사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한국 영화를 상징하는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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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충무로가 영화의 거리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60년대 전성기를 맞이한다. ‘충무로 시스템’이라고 불리던 영화 제작 방식이 바로 60년대에 생긴 것.

다방에서 꿈을 실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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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꿈인 이들은 충무로 3가의 다방으로 향했다. 스타다방, 청맥다방 등 다양한 다방에 감독, 배우, 스태프들이 모였다. 이곳만 가면 함께할 동료들을 채워나갈 수 있었으니, 다방은 한국의 모든 영화의 꿈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덕분에 엄청난 양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한국의 알랭 드롱으로 불렸던 신성일 배우는 이 당시 최고의 청춘스타였다. 그러나 70년대, 텔레비전이 대중들에게도 보급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화법 개정, 외국영화 수입권 등으로 인해 충무로 영화판은 빠르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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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충무로에 가면 영화판의 흔적을 거의 볼 수 없을 터. 그러나 지금까지 충무로가 한국의 할리우드를 자처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한국 영화의 시작점이 충무로였기 때문이다.

극장이 없는 한국 영화인들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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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역 안에는 ‘영화의 길’이 있다. 한국 영화의 역사가 짧게나마 그려져있다. 사람들은 영화의 고향을 되새기기 위해 잠시나마 발걸음을 멈추고 과거를 추억한다.

그러나 충무로역 밖을 나서면 영화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등장 이후 열심히 살아남았던 ‘대한극장’마저 문을 닫으며, 한국 영화의 고향 충무로에는 영화관이 없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충무로역 지하 1층에 있는 ‘충무로 영상센터 오!재미동’ 하나가 있긴 있다. 오!재미동은 20-3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여기서 숨겨진 보석 같은 단편 영화, 독립 영화들을 상영한다.

한국 영화 시장의 대명사인 충무로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은 지하철역에 하나 남아있을 정도로 영화 시장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동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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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고 지나가면 그저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터. 지명에는 여러 가지 재미난 이유가 담겨있다.

과거의 악몽을 타파하기 위해 자리 잡은 이순신 장군의 시호 그리고 한국 영화의 뿌리까지.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충무로를 걷는 날, 맥동하는 한국의 역사와 현재를 느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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