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번잡을 피해 북쪽으로 끝없이 달리다 보면 다다르는 곳, 헤이리 예술마을. 작정하고 예술인들이 모인 이곳에서는 고요한 안식과 예술과의 짜릿한 만남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박물관, 숲길, 음악 감상 공연장 그리고 즐비한 맛집들까지. 수많은 ‘핫 플레이스’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터줏대감은 단연 게스트하우스, 모티프원이다. 18년간 4만여 명의 여행자들을 맞이하며 자리를 지켜온 이곳. <글로우업> 매거진이 모티프원의 이나리 호스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빠르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고요하게 휴식하는 방법부터 그녀의 사적인 라이프스타일까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모티프원의 호스트이자 배우, 이나리다. 2005년 첫 게스트를 맞이한 이후부터 1년 전까지는 아버지가 운영하셨고 지금은 혼자 운영하고 있다. 마치 안거에서 해제된 승려처럼 기약 없는 시간 동안 길 위에서 삶을 성찰하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현재 세계 유랑을 떠나신 상태다. 나는 대학교 때부터 자연스럽게 일을 도우며 운영을 배우고 익혔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하게 일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매일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호스트의 삶은 어떠한가?
다양한 사람들의 기쁨과 깊은 번민에 함께하는 건 분명한 장점이다. 이곳을 운영하며 세계 곳곳의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삶의 방식도 있을 수 있구나’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20대 성장의 과정을 함께한 공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한 느낌.
‘호스트 이나리’이기도 하지만 ‘배우 이나리’이기도 하다. 도심과 동떨어져 있는 곳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한 불안함은 없는지?
예전에는 커뮤니티에 속하고픈 마음이 컸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건 뭔가 분리된 느낌이 강하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나’는 이런 목가적인 삶을 좋아하는 것 같다. 또, 연극 작업과 모티프원 운영이 서로 좋은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번 새로운 게스트분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서로의 지향과 아직 도달하지 못한 목표에 대해 함께 나누는 것은 배우로서 엄청난 이득이다. 두 직업 중에 하나만 택했다면 시야가 완전히 달랐을 것.
서재에 빼곡하게 꽂혀져 있는 책들 덕에 이곳은 ‘북스테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만큼 빠른 디지털 세상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많이 찾는다고. 그들에게 권하고픈 특별한 휴식 방법이 있을까?
모티프원은 손만 뻗으면 책이 있는 공간이다. 책 한 권을 온전히 다 읽지 않아도 좋다. 단순히 책 제목을 읽거나 흥미로워 보이는 책을 꺼내 훑어보며 ‘책’ 그 자체를 즐겨봤으면 좋겠다.
아, 서재와 방 곳곳에는 방명록들도 있다. 그 방명록들은 여러 사람들의 책이다.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담겨 있으니 한 번씩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무언가를 끝냈거나 시작할 때, 인생의 변환점을 삼으러 모티프원을 찾는 이들이 많다. 그들이 써 내려간 고민과 다짐들 사이에서 용기와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 그 방명록의 일부는 모티프원의 방명록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읽을 수 있다. 아이디는 @motif.1_guestbook
호스트 이나리가 자기 자신에게 휴식을 주는 방식이 따로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나를 포함한 삼 형제에게 ‘글을 써라’라고 가르쳤다. 무언가를 경험하고 체험했을 때 그것을 온전히 소화하려면 글로 써내려야 한다고. 그래야만 비로소 그 경험이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일기든 에세이든 산문이든 글로 써내는 시간을 가지면서 천천히 나의 경험들을 소화하는 시간을 즐긴다. 방문자들에게도 권하고 있는 방식.
책 한 권을 들고 혼자 밥을 먹으러 가거나 카페에 가는 시간 역시 애정한다. 나 자신에게 주는 일상의 틈을 즐기는 편. 헤이리 예술마을 위쪽에 위치한 노을 숲길을 걷는 것도 좋아한다. 북쪽이 훤히 보이는 숲길의 노을은 그야말로 장관. 아침엔 산책하면서 강아지들이 산책 나온 모습도 보고 마을 사람들이 청소하는 장면도 본다. 소소한 일상 속 힐링이다.
1만 권이 넘는 책들이 자리 잡고 있는 모티프원의 서재. 그중에서도 특별히 애정하는 책이 있는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이 책을 집필한 김원영 작가는 장애인이면서 배우이면서 변호사다. 작가가 살아가면서 마주하고 느껴야 했던 차별, 사회에 던지는 질문들과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한 책이라 애정하고 있다. 나는 사회 소수자에 대한 공연을 많이 했다. 청소년 주거권 네트워크랑 함께 공연을 만들기도 했고 미군 위안부, 탈가정 청소년 등에 대한 얘기도 했다. 그러면서 느낀 건 내가 소위 말하는 ‘일반인’이라는 거다. 우리 사회에는 사각지대들이 많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차별 없이 모두가 지녀야 할 권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한강 작가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페르난두 페소아 작가의 <불안의 서> 역시 추천하는 책들.
수많은 예술인들이 이곳에서 작업하고 교류하며 휴식을 취했다. 모티프원을 다녀간 방문자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가 있는지?
‘워케이션’, ‘노마드족’과 같은 말들이 탄생하기도 전에 나는 이곳에서 사회의 흐름을 몸소 체험했다. 어느샌가부터 노트북을 들고 이곳에 와서 일하며 휴식하는 분들이 늘어났고, 이후에 워케이션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실제로 이곳에 와서 책을 집필하고 나서 출판된 책을 보내주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런 분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전 세계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호스트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게스트하우스 호스트를 꿈꾸는 이들에게 건넬 조언이 있다면?
‘예약’은 곧 손님과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필히 수행되어야 한다. 갑자기 에어컨이 고장 나거나, 내가 아프거나 할 수도 있다. 그런 변수들을 컨트롤하며 책임감을 갖고 운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취향이 확고한 아버지가 오랜 시간 동안 공간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해 두신 상태였고, 나는 고락을 함께하는 가족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방향성에 동의했다. 맨 처음부터 내가 이 공간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더 어려웠을 것. 다만 게스트하우스의 호스트라면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무엇을 경험하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 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