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는 웬만큼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 이상 잘 알지 못하는 분야다. 하지만 그럼에도 쳇 베이커의 ‘I fall in love too easily’는 들어봤을 것. 감미로운 목소리와 잔잔하게 흐르는 트럼펫 연주는 지금까지도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감성적인 곡으로 사랑받고 있다.
오늘은 쿨 재즈 장르를 상징하는 별, 트럼펫 연주가이자 보컬리스트였던 ‘쳇 베이커(Chet Baker)’에 대해 소개한다. 천재적인 재능과 출중한 외모, 감미로운 목소리까지 모두 가졌지만 그 누구보다 ‘막장’의 인생을 살았던 그. 평단의 혹평을 달고 살았지만 수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던 쳇 베이커의 삶에 대해 함께 알아보자.
My Funny Valentine
쳇 베이커는 본격적인 활동을 4중주단 그룹으로 시작했다. 콰르텟(4중주단)은 레전드 트럼펫 연주가 ‘마일즈 데이비스’와도 협업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었던 제리 멀리건의 색소폰을 필두로 드럼, 베이스, 그리고 쳇 베이커의 트럼펫으로 구성됐다.
그룹은 좋은 활약을 펼쳤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초청 공연을 가지고, 판타지 레코드의 제안으로 함께 녹음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레코드의 제안으로 탄생한 곡 중 하나가 바로 쳇 베이커의 상징적인 곡으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My Funny Valentine’이다. 점차 인지도와 인기를 얻어 가던 찰나, 멀리건과 쳇 베이커의 콰르텟은 폭파됐다. 왜냐고? 제목을 봤다면 짐작할 수 있을 것. 쳇 베이커의 인생을 망친 가장 큰 원인인 ‘마약’은 전성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등장한다. 리더 역할을 했던 멀리건은 헤로인 중독자였다. 물론 콰르텟에 소속됐던 인원들도 마찬가지. 쳇 베이커는 차에서 대놓고 대마초를 피우다가 체포되기도 했다.(집행유예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약에 취해있는 날이 갈수록 많아지던 그들은 결국 집을 급습한 경찰에 발각됐고, 멀리건 부부와 쳇 베이커 부부는 모두 체포됐다. Chet Baker Sings
멀리건은 모든 혐의를 가져갔다. 어찌 보면 쳇 베이커를 살려준 셈. 멀리건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고, 쳇 베이커는 풀려났다.
당시에도 쳇 베이커는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인기가 대단했고, 판타지 레코드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새로운 콰르텟 결성을 제안했다. 그렇게 그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스트링 앙상블과 쳇 베이커의 트럼펫 연주로 완성된 앨범 [Chet Baker & Strings]가 홈런을 쳤다. 그리고 1954년, 드디어 쫀득하고 감미로운 쳇 베이커의 목소리가 담긴 음반 [Chet Baker Sings]가 공개됐다.
‘Time After Time’, ‘My Funny Valentine’, ‘I Fall in Love Too Easily’ 등 수록곡 대부분이 큰 인기를 얻었고, 훗날 이 앨범은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하지만 재즈에 진지했던 비평가들은 그의 성공을 비웃었다. 하지만 쳇 베이커는 잘 나갔다. 심지어 <지옥의 수평선>이라는 지금은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운 B급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래도 보고 싶어요
여기서 잠시 그의 복잡한(?) 여자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그의 첫 번째 부인 샬레인은 성격이 화끈했다. 쳇 베이커의 인기에 늘 불안에 살았지만, 가만히 있지도 않았다. 그가 바람을 피우는 건 부지기수였기에 그녀도 웬만하면 모르는 척 넘어갔다. 하지만 역시나 마음은 썩어가고 있었나 보다. 쳇 베이커가 여느 날처럼 프랑스계 여인 릴리아와 바람을 피우고 있을 때 그녀는 권총을 들고 찾아갔다. 흥분에 가득 찬 그녀는 권총을 겨누며 협박했는데, 대상이 재밌다. 바람을 피운 쳇 베이커가 아닌, 그에게 접근한 릴리앙이었기 때문. “그의 곁에 다시는 얼씬거리지 마”라며 경고했다.
결국 둘은 이혼했고, 쳇 베이커는 당시 바람피우던 릴리앙과 재혼했다. 누가 봐도 쳇 베이커를 욕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샬레인은 그럼에도 쳇 베이커를 그리워했다. 이후로도 쳇 베이커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고, 그 대상은 기상천외했다. 만남의 상대 중 한 명은 함께 일하던 동료의 부인.
“그래도 그이가 보고 싶어요” – 샬레인 (제임스 개빈 – 쳇 베이커 발췌)나를 가만히 내버려 둬
운이 다했던 것일까. 쳇 베이커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마약으로 인해 잘생긴 외모와 연주 실력 모두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입지가 줄어들자 유럽으로 향했고, 유럽에서의 입지가 줄어들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약쟁이 소탕에 집중하고 있었고, 약에 빠져살던 쳇 베이커는 경찰서를 자기네 집처럼 드나들었다. 더불어 새롭게 발매되는 앨범마다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면서 그는 레코드로부터 계약 해지를 통보받았고, 도망치듯 부모님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약쟁이가 돼서 돌아온 쳇 베이커를 부모는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희망도 놓지 않은 부모는 그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쳇 베이커는 그럼에도 약을 찾아 헤맸다. 간혹 공연 기회가 있었지만 이미 그는 망가져있었다. 공연 도중에 삑사리를 내고,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은 등 엉망인 공연을 펼쳤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찾는 곳은 사라졌다. 말년에 정신을 차린 걸까
쳇 베이커의 말년은 최악이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의 곁에는 이제 더 이상 여자들도 남아있지 않았고, 돈도 없었다. 과거의 연주 실력과 목소리도 사라졌다. 오로지 남은 건 마약과 손가락질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죽음을 직감하는 와중에도 손에서 약을 놓지 못했다. 더 이상 몸에 주삿바늘을 꽂을 곳이 없자 그는 고환에 마약을 투약하기도 했다. 그렇게 암울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던 말년의 그에게 대규모 공연 기회가 주어졌다. 무려 ‘북독일 방송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대규모 공연이었지만 쳇 베이커는 단 한 번도 리허설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정말이지 자기 마음대로였다. 그럼에도 공연은 치러졌고, 웬일인지 별다른 이슈 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그 공연은 쳇 베이커 일생의 마지막 공연이 됐다.자살인가 타살인가
온몸이 마약 투약을 위한 바늘 자국과 고름으로 가득 찼던 쳇 베이커는 암스테르담의 싸구려 호텔 3층에서 추락사했다. 당시 그의 얼굴은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품에는 트럼펫이 함께 있었다. 유서는 없었고, 당시 그의 나이는 59세였다.
쳇 베이커는 분명 쿨 재즈 장르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다. 마약과 여자 문제만 없었다면 전설적인 트럼펫 연주가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처럼 음악사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인물이 될 수도 있었다. 방탕하고 제멋대로인데다가 약과 여자 문제로 조용할 날이 없던 그의 평가는 당연히 좋지 않다. 제아무리 훌륭한 음반과 곡을 남겼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흑인들의 무대였던 재즈 신(SCENE)에서 꽤나 큰 자리를 차지했던 쳇 베이커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엇갈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훌륭한 연주와 이해도를 가졌던 그의 재능은 분명 눈부셨다고 말한다. 필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방탕하고 자기 멋대로인 삶을 살았지만, 음악만큼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쳇 베이커의 곡을 지금 바로 감상하러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