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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프랑스를 이끌었다

안나 카리나, 그리고 누벨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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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가 스크린 앞에 앉는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의 영화 속 잔 다르크를 보며 자신의 죽음을 어렴풋이 떠올린다. 그녀는 안나 카리나. 2019년 12월, 안나 카리나는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스크린 속에 잔상처럼 남아 있다.

1950년대 프랑스 영화계에 새로운 물결, 누벨바그가 일었다.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의 배우 안나 카리나는 장 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과 함께 프랑스를 이끌었다. 그녀는 누벨바그의 얼굴이었다.

덴마크에서 태어난 해느 카린 바이어.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늘 눈과 이마가 너무 크다는 지적을 들으며 자란 그녀는 사랑받고 싶었다. 불행한 가정과 의붓아버지의 학대 속에서 덴마크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의붓아버지가 그녀를 폭행했을 때, 결국 집을 나왔다. 해느 카린 바이어는 할아버지가 준 15달러를 들고 히치하이킹을 해 파리로 떠났다. 그녀는 불어를 할 줄 몰랐지만, 무작정 그곳으로 향했다.

1958년 여름, 파리의 레 뒤 마고에 앉아있던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프랑스의 여느 매거진 화보 촬영에 나와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촬영이 끝난 후 그녀는 재능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연락처를 몇 개 받을 수 있었다.

이후 광고 모델로 자리 잡은 해느 카린 바이어는 피에르 가르뎅과 코카콜라의 모델이 되었다. 어느 날 화보 촬영 중 만난 코코 샤넬이 그녀에게 물었다. 인생을 살아가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이다. 해느 카린 바이어는 배우라고 답했다. 뒤이어 코코 샤넬은 이름을 물었다. 해느 카린 바이어. 그런 이름으로는 배우가 될 수 없다며 코코 샤넬은 ‘안나 카리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안나 카리나는 모델로서 입지를 다졌지만 여전히 연기의 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를 찍기 위해서는 불어를 배워야만 했기에 그녀는 늘 영화관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안나 카리나가 촬영한 팔몰리브의 비누 광고가 장 뤽 고다르의 눈에 띄었다. 당시 카이에 뒤 시네마에 평론을 기고하던 고다르는 그의 장편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의 배역을 캐스팅하고 있었다. 그는 안나 카리나에게 출연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누드 장면을 찍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이후 <네 멋대로 해라> 촬영을 마친 고다르는 안나 카리나에게 <작은 병정>의 주연 자리를 제안하며 그녀를 캐스팅했다. 그의 전작 <네 멋대로 해라>가 비공개 상영과 함께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안나 카리나는 오디션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고다르는 다음 날 그녀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렇게 <작은 병정>을 시작으로 안나 카리나와 장 뤽 고다르는 <비브르 사 비>, <미치광이 피에로>를 비롯해 일곱 작품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다. <여자는 여자다>로 안나 카리나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여자 연기상을 수상하지만 흥행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누벨바그 시대의 영화들은 기존의 틀을 깨고자 늘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고, 실험 정신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와 사운드가 관객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결국 고다르는 다음 작품 제작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1962년작 <비브르 사 비>는 안나 카리나와 장 뤽 고다르의 필모그래피를 대표하는 영화 중 하나다. 하지만 고다르가 회상하길, <비브르 사 비>는 둘의 이별의 시작이었다고.

“고다르는 담배를 사러 간다고 하고 3주 후에야 돌아오는 사람이었다.” – 안나 카리나

안나 카리나와 장 뤽 고다르는 이별과 화해를 수없이 반복했다. 안나 카리나는 여타 감독의 영화에도 다수 출연했지만, 고다르만큼 그녀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뮤즈로 사는 게 좋아요.”

장 뤽 고다르는 <국외자들>로 다시금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프리 프로덕션 기간 중 안나 카리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퇴원 후 고다르는 카리나에게 내일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전했다. 그 영화가 바로 <국외자들>이었다.

“당시 나는 삶의 이유를 잃었다.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나를 구했다.”

이후 안나 카리나의 불륜으로 두 사람의 사이가 또 한번 멀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알파빌>을 함께 했다. 안나 카리나가 맡았던 배역인 ‘나타샤’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한다. 레미 코숑은 그녀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가르친다. 어쩌면 이는 고다르가 영화를 통해 안나 카리나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965년, 둘은 짧았던 결혼 생활을 마치고 이혼했다. 그후 촬영은 이어졌지만 1966년작 <아메리카의 퇴조>를 끝으로 둘의 파트너 생활도 마침표를 찍었다.

1972년, 그녀는 카메라 뒤에 섰다. 배우로서의 안나 카리나는 스타였지만, 감독 안나 카리나는 그렇지 못했다. 투자를 받지 못한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촬영을 진행하고, 스태프의 식사를 직접 요리해 대접했다. 그렇게 탄생한 영화 <비브르 앙상블>은 칸 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지만 혹평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배우로 남길 바랐다. 그녀는 이후로도 소설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앨범 두 장을 냈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다.”

프랑스를 이끌었던 안나 카리나와 장 뤽 고다르. 그들은 2019년, 2022년에 우리 곁을 떠났다. 장 뤽 고다르만큼 안나 카리나의 깊이를 담아낼 수 있는 감독도 없었고, 안나 카리나만큼 그의 카메라 속에서 빛난 배우도 없었다. 카리나도, 고다르도 서로가 서로의 뮤즈였다. 그들의 시대는 저물었고 누벨바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영화를 다시 재생하는 순간 필름 속에서 그들은 살아 숨쉬며 우리에게 다가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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