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펑크(Punk)’라는 과격한 반문화의 등장은 세상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라몬즈와 섹스 피스톨즈, 90년대 들어서는 너바나와 그린 데이 등의 아티스트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펑크’ 이미지를 구축했다.
펑크 정신으로 똘똘 뭉친 펑크족들은 소위 ‘미친놈’이라 불릴 만큼 막무가내인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펑크 문화를 선호하는 에디터지만, 펑크족들의 과격한 퍼포먼스에는 원흉이 있다. 라몬즈와 섹스 피스톨스가 영감을 받았던 밴드 스투지스의 ‘이기 팝(Iggy Pop)’이다.
막 펑크 붐이 일었던 70년대 사람들에게도 쉽지 않았던 문화를 60년대에 선도했던 사람이라면 담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감이 온다. 심지어 그가 활동할 때는 펑크 문화라는 개념이 나타나기 전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기 팝의 공연은 퍼포먼스가 아닌 ‘기행’에 가까웠다고.
펑크의 대부가 누군데
펑크 문화는 런던 이전에 뉴욕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흔히 펑크의 대모라고 불리는 인물은 런던 펑크의 선구자인 패션 디자이너이자 운동가 ‘비비안 웨스트우드’다. 우리가 펑크 하면 떠올리는 ‘DIY(Do It Yourself)’ 정신, 타탄체크 디자인 등으로 런던 펑크의 문법을 정립시킨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펑크의 대부는 그녀의 옆에 있던 남자친구 말콤 맥라렌일까. 아니면 뉴욕 펑크의 대표 밴드인 라몬즈, 뉴욕 돌스일까. 갓 파더(Godfather)는 더 이전에 존재한다.
60년대 미국은 자유와 평화, 사랑을 외치며 LSD를 즐기던 히피들이 문화의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언더그라운드에서는 냅다 지르고 보는 파괴적인 행동으로 이목을 끌던 밴드가 있었다. ‘스투지스(Stooges)’. 이들은 펑크의 시작으로 일컬어진다. 훗날 스투지스에게는 펑크 이전의 세대, ‘프로토 펑크’라는 이름이 붙었다. 스투지스의 프런트맨 이기 팝이 펑크의 대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제임스 오스터버그’. 이기 팝의 본명이다. 그는 태초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담배도, 마약도 하지 않고 미시간 대학에 진학했던 블루스를 좋아하는 청년이었다고. ‘이기 팝’이라는 이름은 학창 시절 드러머로 활동했던 블루스 밴드 ‘이구아나스’에서 ‘이기’를 따왔고, ‘팝’은 지역 캐릭터 이름이었다.
아무튼,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그는 락 역사상 최고의 프런트맨 중 한 명으로서 온갖 기이한 행동을 무대 위에서 보여주었다.
얼마나 과격했길래
그러게 얼마나 충격적이길래 이들을 펑크의 시초라고 부르는 걸까. 록 밴드의 멤버라면 이전부터 감당 안 되는 행동들에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일단 밴드인데 연주 실력이나 기교를 중요시하지 않았다. 실력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들을 대표하는 사운드는 심플한 코드를 반복하는 단순한 연주와 소리를 지르거나 이상한 목소리를 내는 괴성이 함께했다. ‘I Wanna Be Your Dog’, ‘No Fun’. 네 개가 되고 싶다니.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이기 팝은 해당 두 곡의 단순한 연주를 듣고 감탄하며 순식간에 가사를 썼다. 연주만큼이나 가사도 단순하다. ‘Dog’를 쓴 이유는 거꾸로 하면 ‘God’이기 때문이라고.
퍼포먼스는 시대의 심벌로 거론되는 반항아, ‘도어즈’의 ‘짐 모리슨’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드러머 출신이었던 그는 약에 취해 무대를 날뛰며 관객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광기의 프런트 맨이었다. 이기 팝은 짐 모리슨의 행보를 그대로 이어갔다. 아니, 더 심했다고 보는 게 맞다.
스투지스는 스테이지 위에서 최초로 관객들을 향해 다이빙을 시도하고, 관객들이 몸을 뒤로 넘겨주며 수영하는 듯한 행위인 ‘크라우드 서핑’을 했다. 팬티 한 장만 입고 무대를 장식하고, 한창 약에 빠져있을 때는 공연마다 악기를 부수고 자해까지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자신의 음악처럼 정녕 ‘미친개’가 된 것이다.
펑크의 상징이라 불리는 섹스 피스톨스의 ‘시드 비셔스’는 이기 팝의 광팬이었다. 제대로 물려받은 펑크 정신으로 시드 비셔스 역시 엄청난 무대 매너로 유명했다. 가장 유명한 그의 퍼포먼스가 공연 중에 깨진 병으로 몸에 ‘약을 달라’는 글을 쓴 것이다. 이기 팝이 얼마나 펑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보위와 만났다
스튜디오에서의 레코딩보다 무대 위에서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담아낸 스투지스의 두 번째 앨범 <Fun House>가 망해버렸다. 그래도 꾸준히 쌓아둔 인지도 덕분에 지하 세계에서 나온 이기 팝은 시그니처인 빨간 개 목줄을 찬 채 페스티벌 공연도 다녔다. 앨범은 훗날 펑크 록과 하드 록을 개척한 사운드를 담아냈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연주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밴드 멤버들은 약에 절어있었고, 결국 스투지스는 1971년 7월 9일에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이기 팝은 약물 재활 치료를 받으며 새로운 음악의 길을 모색하던 중, 나이트클럽에서 데이비드 보위를 만났다. 데이비드 보위는 이기 팝의 공연 방식에 매료되어 있었다. 보위는 이기 팝을 자신의 작업실로 초대했고, 동갑내기에 서로가 서로의 영감이 되는 친구가 되었다. 보위의 파격적인 퍼포먼스는 이기 팝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데이비드 보위가 프로듀싱한 이기 팝의 새로운 스투지스 앨범 [Raw Power]를 발표했다. 공연에서 평소처럼 과격한 퍼포먼스를 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데이비드 보위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분장을 했다는 것. 보위가 이기 팝에게 영향을 받은 것처럼, 이기 팝도 보위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회사는 자신들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친다며 새로운 앨범이 나온 스투지스에게 공연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두 번째 스투지스도 해체하게 됐다.
그래도 함께야
베를린으로 넘어간 이들은 함께 살 아파트와 작업실을 구하고 이기 팝의 앨범 [The Idiot], [Lust for Life]가 데이비드 보위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이기 팝은 보위의 프로듀싱 덕분에 재기에 성공했다.
마약 중독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던 이기 팝을 직접 찾아오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명이 데이비드 보위였다. 뭐, 이기 팝만 마약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위 역시 마약으로 이름 좀 떨친 인물.
아무튼 지기 스타더스트로 이미 최고의 아티스트 반열에 올랐던 데이비드 보위는 이기 팝과 우정을 끝까지 유지했고, 둘은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음악적으로는 데이비드 보위, 영화로는 <김미 데인저>라는 스투지스 다큐멘터리를 함께 했던 짐 자무시와 친했던 예술계의 원피스의 루피 같은 존재 이기 팝. 펑크라는 문화적 운동이 대중에게 다가오면서 그의 행보는 재조명 받았다.
77살의 나이에 주름이 가득해도 여전히 옷을 모두 벗고 무대를 장악하는 ‘펑크의 대부’ 이기 팝과 과격한 하루를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