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도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보고 홍콩의 화려함과 그 정취를 느끼고자 떠난 적이 있다. 그러나 스크린 속에 존재했던 홍콩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타락천사>의 네온사인 간판도, <화양연화>의 골드핀치 레스토랑도 모두 사라진 홍콩에는 여유 없이 바빠 무뚝뚝한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희미해진 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이 어쩐지 외로움을 더했다. 그리움의 도시, 외로움의 도시, 홍콩이었다.
1997년 7월 1일, 영국의 홍콩 지배가 끝나 중국으로의 반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홍콩은 지난 99년을 뒤로하고 새로운 것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왕가위 감독은 여기에서 비롯된 젊은이들의 방황과 혼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광각 렌즈로 담아낸 인물들은 한없이 고독하고 외로우며 불안하다.
그의 영화는 눅눅한 여름, 낡은 청킹맨션, 그리고 오래되어 바랜 선풍기마저 곱씹게 만든다. 또 홍콩에 가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홍콩의 밤거리를 거닐고 있는 느낌을 준다. <타락천사>의 ‘First Killing’을 들으면 왠지 여명과 함께 하는 킬러가 된듯한 기분이 들고, <중경삼림>의 ‘Things in Life’를 들을 때면 고단한 하루 끝에 마시는 임청하의 위스키 한 잔이 떠오른다. 여긴 90년대 홍콩도 아닌데 말이다.
느껴본 적 없는, 다시는 느낄 수 없는 90년대 홍콩을 추억하며.
중경삼림
외로움은 인간의 숙명이다. 인간이 나약한 이유는 혼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외로움은 당연한 것이기에 시시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왕가위 감독은 그런 시시콜콜한 소재로 우리를 매료시킨다.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의 첫인상이다. <중경삼림>은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 감독이 스텝 프린팅 기법으로 담아낸 정신없는 청킹 맨션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마약밀매상 임청하(금발머리 역)가 사라지면 총성과 함께 ‘重慶森林’ 타이틀이 한 글자씩 나타난다. 이 타이틀 시퀀스에서 쓰인 네 발의 총알은 우리의 뇌리에 깊이 박힌다.
“매일 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가지만 아마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없을 것이다.”
시대 속의 고독은 그들의 나레이션에 투영되어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다. 감독은 지난 99년과 다가올 미래 사이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이들의 시간을 붙잡아 본다. 그러나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추억은 항상 눈물을 부른다.
화양연화, 그리고 2046
“쉽게 떠나는 사람도 있고 오랫동안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2046년, 홍콩은 중국에 귀속된다. 역사는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지만 그들은 시간 속에서 여전히 그때의 기억을 끌어안고 있다. 지나간 시절은 먼지 쌓인 유리장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기에 그는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양조위가 수리 첸을 여전히 기억하듯이, 왕가위 또한.
타락천사
청부 살인을 하는 킬러 여명(황지민 역)과 그의 현장을 정리하는 이가흔(파트너 역)이 <타락천사>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연으로 등장한다. 청부 살인이라는 소재를 가장 낭만적으로 담아낸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사람이 남긴 쓰레기를 보면 최근에 뭘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이 술집에 자주 온다. 이런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나 보다. 그가 앉았던 자리에 앉으면 같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명이 이가흔에게 남기고 떠난 마지막 메시지는 주크박스의 1818번이다. 이가흔이 술집을 다시 찾으면 1818번 음악, 그러니까 관숙이의 ‘망기타’가 흘러나온다.
“그를 잊는다는 건 모든 것을 잊는 거예요. 갈 길을 잃어버리고 나 자신마저 잃어버려요.”
2021년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이 4K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기존 흑백이었던 이 장면의 배경에 컬러가 입혀졌다. 그러나 이가흔은 여전히 흑백으로 남겨져 쓸쓸함을 더했다.
“이 길은 집까지 그리 멀지 않으며 곧 내려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지금 이 순간은 매우 따뜻하다.”
방랑에 다른 이름이 있다면 외로움일 것이다.
경찰 223의 바람과 달리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가 남긴 필름의 유통기한은 만 년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