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좀 주소. 목 마르요.”
절규하듯 외치는 이 한 마디는 한국 대중음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가수 이상은이 항상 롤 모델로 꼽는 거친 목소리로 포크 음악을 노래하는 음악가, 한대수.
가수 ‘송창식’은 그를 진짜 히피 가수라고 평가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놓고 ‘한국 최초의 히피 가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마약을 하며 노래를 부르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긴 머리에 자유와 평화를 외치고,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아티스트였을 뿐.
번안곡이 넘쳐났던 시대에 홀로 직접 작사 작곡을 한 대한민국 1호 싱어송라이터 한대수는 영화 같은 사연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재벌 집 아들의 음악 DNA
태어날 때부터 환경이 남달랐다. 한대수의 할아버지 ‘한영교 박사’는 1920년대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사람이자 신학 명문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출신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프린스턴 동문이라고. 한영교 박사는 연세대 설립을 함께하기도 한 엘리트였다.
어머니는 부산 ‘국제시장’에 대형 창고를 가진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자란 피아니스트 ‘박정자’. 1920~40년대, 보기도 힘들었을 피아노에 할아버지 역시 바이올린을 부전공하며 연주하셨으니. 그가 음악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한대수는 이런 환경을 바탕으로 자신이 음악가가 될 운명이었다고 언급했다.
아버지가 실종되다
아버지 ‘한창석’ 역시 할아버지의 두뇌를 물려받아 서울대 공대에 진학해 ‘핵물리학자’가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핵 무기가 필요하다 생각했고, 아들을 핵물리학자로 키워냈다. 한창석은 핵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코넬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한대수가 태어난 지 100일 만이었다.
그는 수소폭탄의 아버지 ‘에드워드 텔러 박사’가 선택한 촉망받던 핵물리학자였다. 그런데 미국으로 유학 간지 7년 만에 아버지가 실종됐다.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아버지를 16살이 될 때까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자란 한대수. 어느 날 그는 ‘FBI’를 통해 아버지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10년 만에 나타난 한대수의 아버지는 대학생 때 유학을 갔음에도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실종됐던 세월에 대해 한대수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한대수는 아버지가 미국에 의해 ‘브레인 워싱’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핵 무기 개발 기술을 한국으로 빼돌려 갈 수 있어 마인드 컨트롤 당했다는 것이 한대수의 주장이지만, 말을 하지 않았으니, 아버지의 기억 상실 원인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계모에게 받은 구박을 음악으로
핵물리학자였던 그는 인쇄업자가 되어 새로운 가정을 꾸린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한대수는 아버지를 찾았으니, 함께 낚시도 하고, 밥도 같이 먹는 행복한 상상을 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혈육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한대수는 새엄마에게 괴롭힘 당하며 자랐다.
미국에서는 동양인이라고 차별받고, 한국에서도 10살 때 뉴욕으로 떠났던 그를 양키라고 놀려댔다. 그는 한없이 외로운 인간이었다. 그렇게 학교를 마치고 혼자인 방으로 들어갈 때면, 기타를 매고 자신의 신세와 외로움을 음악에 담아내며 한풀이를 했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줘.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그렇게 18세에 ‘행복의 나라로’라는 음악을 만든 한대수. 에디터가 가장 좋아하는 한대수의 곡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행복의 나라에는 규정된 것이 없다. 어린아이들의 노는 소리, 푸른 하늘에 넓은 광야, 냉정함의 고통이 없는 세상일 뿐.
그는 본인의 고난과 고통을 담아내 자신의 상처치유를 위해 곡을 만들었다. 그러나 시대가 한대수와 닮아있었다. 그렇기에 이 곡은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닿았다. 그 당시를 대표하는 가수인 조영남, 양희은, 이선희 등 많은 음악가가 이 노래를 불렀다.
청년문화 세대를 일으키다
통기타를 매고 한국으로 돌아온 한대수는 70년대 청년 문화의 시발점이었다. 한국인들은 긴 머리에 수염도 안 깎고, 기타와 하모니카를 맨 채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그의 자유분방함에 당황했다.
한대수는 해외파답게 ‘비틀즈’, ‘밥 딜런’ 등의 음악가들을 좋아했다. 이들이 모두 전주가 나온 뒤에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던 한대수. 그는 자유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란 듯이 한 번 더 그의 반골 기질을 뽐냈다. 그렇게 시작하자마자 노래를 부르는 ‘물 좀 주소’가 탄생했다. 청춘의 답답한 마음을 쏟아내는 듯이 노래하기에 대중들은 한대수의 목소리로 억압된 감정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금지, 금지, 금지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가 담긴 1집이 포크와 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면, 2집 <고무신>은 국밥 냄새로 가득하다.
“우리 엄마 우리 아버지 만수무강하옵소서, 만수무강이 좋아”
철조망에 고무신을 걸어놓고 찍은 이 앨범 사진이 문제가 되었다. 결혼 후 집 앞에 있는 철조망에 녹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묘한 분위기를 느껴 찍은 사진이었다. 철조망은 자유의 억압을 상징하고, 고무신은 정치범들이 마음에 안 든다며 약간은 의도한 사진이었다.
여치로 불리던 ‘장준하’가 죽은 시기에 ‘여치의 죽음’이라는 노래까지, 정부에게 미운 털이 박혔다. 그는 모든 방송 출연 금지를 당하고, 일주일 만에 <고무신> 앨범은 판매 중지 당했다. 속속히 ‘물 좀 주소’가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며 그의 음악은 모두 금지당했다.
기구한 삶일지라도
”고통 속에 환희의 9번 교향곡을 쓴 베토벤처럼 모든 예술은 고통에서 나온다”
미국에선 동양인을 비하하는 칭크로, 한국에선 미국인을 비하하는 양키로 살아왔다. 아버지의 잃어버린 10년은 끝내 알아내지 못한 채 떠나보냈다. 펑크(Punk) 문화를 좋아했던 예술가 첫 아내는 독일 남자와 외도로 이혼했고, 현 아내 역시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실종사건 덕분에 음악을 시작했고, 아내들이 자신을 힘들게 해도 예뻐서 좋다고 말한다. 이게 바로 로큰롤의 삶이라고.
젊음의 상징이자 반골의 음악가. 고통마저 즐겨버리는 그의 이름은 한대수다.